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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l 02. 2024

봄맞이꽃도 우울해

난, 봄맞이꽃. 너무 작아서 쓱 지나치는 들풀이지. 그래도 괜찮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내게 관심을 갖는 건 오히려 불편하거든. 내가 가을 들판에 싹을 내밀었던 세상은 푸릇하고 눈부셨어. 구절초가 머리 위를 하얗게 가득 채운 광경은 정말 멋졌지. 그런데, 낙엽이 떨어지고 아름답던 꽃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온통 거무칙칙해졌어. 나도 밤새 된바람에 움츠려 들다가 새벽에 내린 서리에 몸이 얼어붙었어. "나! 너무 아픈 것 같아!" 거친 숨결 뒤 겨우 토해낸 작은 푸념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형제들이 "겨울은 원래 그런 거야! 말할 힘도 아껴야 해" 그 말을 듣고 난, 기가 막혔어. 귀찮은 듯 대꾸하는 형제들 틈에서 겨울 잎만 빼꼼 내밀고 추위를 견디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 몰라. 당연히 마음이 무겁고 시무룩해지지 않겠어?

봄맞이꽃

날 안쓰럽게 보던 달맞이꽃이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하자 "그냥 못 본척해 줘. 불쌍하다고 달래주지 않아도 돼" 툭 뱉어버린 말이 걸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했어. 그도 나와 같은 해넘이풀이지만, 나보다 높이 자라고 남들이 알아주는 꽃이라 내 처지와 다르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달맞이꽃이 "나에게 넌, 반짝반짝 겨울꽃, 나에게 넌, 봄을 맞는 웃음꽃, 나에게 넌, 씨앗 품은 바람꽃이야! 작아도 겨울 견디고 꽃도 씨앗도 나보다 빨리 피고 맺어서 항상 지켜보고 있지" 그 말에 뾰로통했던 마음이 살짝 누그러져서 "날 좋게 봐줘서 고맙지만, 지금 너무 우울해." 그가 노래로 답했어. "난 달의 요정, 멀어진 달 그리워./ 깊은 가을밤, 살랑살랑 짝사랑 / 야속한 구름, 어두컴컴 발 동동/ 님 떠난 아침, 이슬 젖은 내 모습." 그의 노래에서 슬픔을 느꼈어. 그는 "널 보면 봄 같아서 좋아!" 하며 빙긋 웃었어.

난 잎이 얼어붙은 추위와 언제 이것이 끝날지 몰라 막막해. 오직 가슴속에 있는 생각은 차라리 뿌리가 뽑혀 사라지더라도 내 처지를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야. 그런데 그에게 봄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보고 싶을까? 이 생각은 겨우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 그리고 봄이 되었어. 난, 하얀 꽃잎에 노란 눈을 담은 꽃을 피워냈어. 형제들도 앞다퉈 꽃을 피워서 난 거대한 흰 파도에 휩쓸린 포말 같았지. 사람 몇이 우릴 보고 "봄이 왔구나!" 짧은 탄성을 내뱉듯 던지곤 휙 스쳐 지나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은 꽃받침 위에 열매가 얹혔지만, 난 아직 봄을 잘 모르겠어.

달맞이꽃

그때 키가 훌쩍 자라서 꽃을 피운 달맞이꽃이 날 내려다보며 말했어 "내가 말한 거 기억나? 난, 네가 잠든 밤에도 널 지켜보고 있었어. 네가 여린 몸으로 겨울을 견뎌내고 봄에 앙증맞은 하얀 꽃을 피운 걸 보았고 지금은 씨앗을 맺고 있지. 네가 봄을 맞아들이는 걸 또렷이 보았어. 내 믿음이 맞았던 거지. 넌 내 희망이자 미래이기도 해. 나도 이제 내 짝사랑 달을 맞이할 거야!" 그 말을 들으니 그가 겨울을 참고 봄을 기다렸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 난 한동안 활짝 피었다 지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찾아올 봄을 전하는 꽃이야. 영원한 봄을 맞이할 꽃, 내 아이들을 키워냈어. 그리고 봄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이들에게 봄이 온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겠지. 달맞이꽃을 올려다보며 외쳤어. "달도 네 마음 알 거야! 먹구름 따윈 생각하지도 말아! 달의 마음 믿으라고! 나도 네가 잠든 낮에 널 지켜보고 있을게" 달맞이꽃을 보며 봄을 만날 때 반가웠던 것처럼 봄이 떠날 때 고마운 마음을 더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봄을 만나게 해 준 겨울도 미워하지 말아야겠어. 이제야 난 우울증을 벗어난 것 같아. 누군가 봄이 보고 싶다면, 내 꽃말 '봄의 속삭임'을 희망으로 남길게. 언제라도 봄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야.

봄맞이꽃 군락


- 달맞이꽃에는 우울증 치료에 도움을 주는 성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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