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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Sep 02. 2024

꽃며느리밥풀의 질투

안개 자욱한 새벽, 진홍 꽃잎 속에 하얀 밥알을 품고 있는 난 꽃며느리밥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이름 짓더라. 아무리 배고픈 과거에 지었더라도 괭이밥, 꿩의밥, 까치밥나무, 이팝나무, 조팝나무처럼 곡식 닮은 꽃들이 무슨 죄가 있어. 게다가 난 마음에 들지 않는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어. 어느 깊은 산골에 신랑을 여인 젊은 아낙이 고된 시집살이를 하며 살고 있었대. 하루는 뜸이 잘 들었나 밥알 맛을 보는데 시어머니가 보곤 "저 년이 밥을 훔쳐먹네" 하며 구박을 했다지. 고된 시집살이에 삶의 의욕을 잃은 며느리는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그 자리에 핀 꽃이 나라고 하더라고. 요즘 같아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억울한 며느리 보듯 날 보는 시선은 정말 싫다고. 꽃에 하얀 밥알로 보이는 것은 벌레들이 날 제대로 찾아오게 하려고 만든 거야. 꽃이 화려해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그냥 휙 지나치면 속상하잖아. 처음 가게를 열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이런저런 노력하는 것과 같아. 그런 내 작품을 밥알로 부르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얼굴에 밥알 붙여 놓고 점심때 떼먹으려고 한 거 아니니 제발 놀리지 말아 줘. 

꽃 속에 하얀 밥알이 들어있는 듯하다

시어머니에게 밥알 몇 개로 구박받은 며느리가 불쌍하긴 한데, 일 년 시집살이 못하는 사람 없고 벼 한 섬 못 베는 사람 없다고 밥알로 평생 놀림받는 내 처지가 더 불쌍하지 않아? 그렇다고 시어머니 편을 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왕년에 범꼬리 안 잡아본 시어머니 없다고 제 시집살이는 그리스 로마신화처럼 읊어대겠지만, 같은 처지였으면서 자식 중하면 가족으로 받아들인 며느리는 더 소중하게 대해야 되는 게 맞지.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잘 아는데, 다독이며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고 얼마나 구박했을까? 그러니 결혼이 무덤이라고 요즘 그 소리 듣기 싫어서 혼인을 피하는 건지도 몰라. 누굴 죽였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고 또 죽고 싶지도 않을 거 아냐. 따지고 보면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시어머니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긴 해? 제 얼굴에 침 뱉기이지. 욕은 욕으로 받게 되고 은혜는 은혜로 갚게 된다는 말을 모르나 봐. 그리고 며느리 처지에서 조금 더 현명했으면 어떠했을까? 며느리 밉게 보는 시어머니는 발 뒤꿈치가 계란 닮았다고도 나무라기도 해. 시어머니도 여자이니 질투가 없지 않을 거야. 밥알 먹는 거 들켰으면 어때? "나랑 드사이다" 하고 웃고 넘기는 거지. 

개미를 종자 도우미로 쓰는 영리한 식물

솥이 검다고 밥이 검게 지어지지 않듯 보이는 것과 속마음은 알 수가 없어. 새 신발은 부대끼며 살이 까지고 신발은 구겨져야 발에 편해지고 익숙해지는 거야. 고부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처음부터 편한 사이는 드물지. 과거엔 그 둘 사이를 그렇게 일방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어. 일제 강점기에 미움받는 며느리가 귀여운 손자를 낳는다는 식의 못된 말들이 들어왔어. 그들은 5월 멍게나 가을 가지는 며느리에게 먹이지 말라라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야? 우린 집 나간 며느리도 전어 굽는 냄새에 들어온다고 먹는 것에 그렇게 박하지 않았어. 내 곁에 며느리밑씻개라고 불리는 풀이 있어. 정말 예쁜 애인데, 사광이풀이라는 좋은 이름 대신 일본에서 쓰인 말이 들어와서 널리 쓰이게 되었어. 까칠까칠한 줄기와 좁은 잎을 보고 며느리 밑이나 씻으라는 거니 얼마나 끔찍한 욕이야. 말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생각을 물들이는 거야. 화가 나도 거친 욕설을 자제하려고 애쓰는 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그래야 하는 거지. 내 꽃말은 질투래. 시어머니의 질투 그건 무언가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사랑하는 아들이 며느리와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서운한 마음은 누구라도 들 수 있지. 그러니 내 처지를 시기해서 그런거라 생각하면 질투로부터 마음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을 거야.

꽃며느리밥풀은 광합성을 하지만 반기생식물로 주변 식물의 뿌리에 달라 붙어 부족한 영양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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