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에 웅웅 거리며 들리는 어수선한 소리.
"아유 불쌍해라 꽃대가 꺾였네"
"그러게요 살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머리가 지끈거리며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꽃집에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아! 꽃대가 무엇에 부딪혀서 부러졌어. 그리고 정신을 잃었나 봐' 희미하게 눈을 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 의식이 돌아왔나 봐요" 가고소 앵초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그러자 군자란이 근엄한 목소리로 "조용히 해봐! 이제 깨어난 모양이니 기다려보자고"
주변을 돌아보던 난 조심스럽게 "여기가 어디..."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여긴 아파트 베란다예요" 앵초가 말했다.
그런데 어딘가 허전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좀 쉬어두게. 집주인이 분갈이를 하려고 자네를 화분 밖에 꺼내서 아직 힘을 낼 수 없을 거야." 군자란 말이 자장가처럼 흐릿해지며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길고 긴 꿈을 꾸었다.
난 파피오페딜럼, 서양난이다. 우린 누군가 시작과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대량으로 키워져 전국으로 퍼져간다. 화려한 꽃을 자랑하며 그 즐거운 축제에 중심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탐스런 꽃송이가 달린 꽃대가 부러지며 물거품이 되었다. 보글보글... 검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는다. 아무리 외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숨 막히는 순간, 허걱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일어났구먼! 악몽을 꾼 거 같네만, 이제 괜찮아 잘될 걸쎄" 커다란 군자란 주황꽃이 활짝 웃었다. 처음에 깨었을 때와 달리 굵은 모래로 채워진 화분에 줄기가 쓰러지지 않게 철사 지지대에 묵여 뿌리도 허전하지 않고 노란 액체 주머니가 꽂혀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영양제예요. 뿌리가 힘을 얻는데 도움이 돼요" 곁에 앵초가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내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단 군자란이 갑자기 화를 냈다. "어찌 그리 못된 사람들이 있나! 스티로 풀로 화분을 채우다니 말이야. 잘못했으면 자넨 말라죽을 뻔했어." 그 말을 듣고 씁쓸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따뜻한 비닐하우스에서 친구들과 아웅다웅 크던 때가 떠올랐다. 그 화원의 주인은 장사꾼이라기보다 꽃을 가꾸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꽃을 출하할 때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그리한 것이다. 그러나 난 싸구려 난화분에 인스턴트 식물처럼 미라가 될 운명이라고 했어도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화분갈이도 하고 온도도 맞춰 멋지게 가꿔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비록 꽃대가 부러지며 그 희망이 좌절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되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큰 충격에 아픔도 잊었었지만, 점점 그 부위가 아려온다. 메말랐던 뿌리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서 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없다.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난 봄을 부르는 꽃이야. 비록 슬리퍼를 신은 내 꽃이 봄을 부르진 않았지만, 봄이 나를 부르고 있다. 화원의 한가운데 있었던 어린 시절처럼 따스한 숨결에 편안해져 다시 잠이 찾아온다. 막막했던 물속이 아닌 내가 꿈꾸던 정원에서 다시 깨어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