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 할아버지가 황망한 모습으로 화분 하나를 들고 오셨다. 흔히 볼 수 있는 난화분이었는데, 어디서 선물 받았구나 싶은 화려한 화분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화분은 금이 갔고 부러진 꽃대에 꽃망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애구 저걸 어째. 제법 오랜 시간 애써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진 느낌이다. 난 이미 두 번째 꽃을 피웠으니 이번에 핀 세 번째 꽃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부러진 꽃대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안쓰럽게 바라본다. 저리 멋진 꽃을 피웠는데... 안타깝기만 하다. 날 돌아본다. 가고소 앵초. 화려함으로 올봄을 풍성하게 채웠지만, 지금 피운 꽃은 정말 혼신을 다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내가 떠난다면 난 어디로 가는 걸까? 무섭고 두렵다.
그런 생각에 저 친구를 바라보며 "아유 불쌍해라! 꽃대가 꺾였네"
내 앞에 백화등이 맞장구를 치며 "그러게요 살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말했다.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저 친구는 어찌 될까? 그런데 집주인이 화분을 조심스럽게 엎어서 꺼낸 속은 온통 스티로 풀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대쪽같이 화를 낸 것은 군자란이었다. "어찌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스티로풀엔 뿌리내릴 수 없다. 물을 주면 수분은 빨아들여 얼마간 살 순 있겠지만, 결국 좀비처럼 물과 양분을 갈구하다가 말라간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느낌이랄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릴 때 의식이 돌아오는 그를 보며 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어머 의식이 돌아왔나 봐요"
그 말을 들었을까? 거친 호흡 끝에 나온 "여기가 어디..."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여긴 아파트 베란다예요..." 하고 앞뒤 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반갑고 흥분되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금은 좀 쉬어두게. 집주인이 분갈이를 하려고 자네를 화분 밖에 꺼내서 아직 힘을 낼 수 없을 거야." 하며 군자란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집주인의 오랜 반려식물이라서 이곳 터줏대감을 자처했다. 그의 한마디는 무게감이 있어 주변 식물들은 그를 따르는 편이라 난 입을 다 물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군자란이 뭐라 말하긴 했지만, 난 그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화분에 박혀있는 영양제에 눈이 갔을 때 지체 없이 대꾸했다. "영양제예요. 뿌리가 힘을 얻는데 도움이 돼요" 저 영양제는 지난해 겨울에도 내 화분에 꽂혀있었던 거다. 누군 싸구려 물약이라고 하지만, 내 뿌리가 거부하지 않고 힘을 내고 꽃을 피우게 한 것을 보면 몸에 좋은 거라고 믿었다. 군자란이 화를 내며 스티로플 이야길 다시 꺼내는 것 같았는데, 난 그 말에 느낌이 없었다. 지금 그걸 화분 밑에 깔고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올해는 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나보다 그를 앞서 보내고 싶진 않았을 뿐이다. '너무 슬프잖아! 내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가 살아나는 모습을 보면서 날 돌아볼 수 있을 거야. 내가 의욕을 잃으면 세상 모든 것이 적이 되지만, 작은 것이라도 그 의지를 옅보며 자신감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의 희망과 내 그것이 같을 순 없어도 그의 하루와 내 그것은 같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아니라도 그가 오늘을 채운다면 나 역시 그럴 것이다. 사랑과 순수함을 추구했던 내 삶을 그에게 말하고 싶다. 그는 어찌 날 바라보며 이야기해 줄까? 내 마지막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가 간절히 깨어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