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차가운 소소리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주위를 돌아보다 시선이 멈춘 곳은 깨진 화분에 매달린 분홍 리본에 굵은 글씨로 '개업을 축하드립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꽃집에서 만난 동양란이 떠올랐다. 질 좋은 굵은 모래로 채워진 청자색 난화분에 황금리본을 둘렀는데, 검찰청에 간다며 한껏 우쭐대던 모습이 부럽기도 했었다. 우린 야생에서 벗어나 키워진 생명이라서 만나는 이의 삶과 동행하기에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꽃꽂이 절화나 화환의 운명보다는 낫다고 할 순 있지만, 꽃이 지면 삶이 다할 수도 있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개업식에 직접 들고 가시다가 꽃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내 미래가 바뀌었다.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겉돌던 뿌리가 마사토 사이를 누비며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새옹지마라고 할까? 내게 나쁜 일은 아닐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고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옆 자리 투박한 토분에 소담스러운 잎사귀를 펼치고 소녀처럼 귀엽게 핀 가고소앵초를 보았다. 다섯으로 갈라진 하얀 꽃잎 가운데 수줍게 찍힌 듯 노란 문양이 새침한 입술 같다. 그녀를 훔쳐본 것은 아니지만 내 눈길을 의식하지 못하니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그런데 뿌리가 살짝 들떠 있는 것이 올 가을을 끝으로 그녀의 아이들에게 제자리를 물려주고 떠날 듯 위태롭게 보인다. 그래서 그랬을까? 날 안쓰럽게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지릿해졌다. 어쩌면 밝고 수다스럽던 말속에 죽음의 그림자를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뿌리와 잎이 나누던 대화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땅 속에 남겨진 우리의 대화는 씨앗이 되어 다시 삶이 된다. 하루살이가 하늘에 머문 시간이 짧다고 날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듯 우리도 뿌리가 흙을 쥐는 힘을 잃었다고 해도 흙에서 다시 태어나려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죽음이 무섭고 슬픈 것은 마찬가지니 서로에게 힘이 되면 좋을 거야. 그 생각을 하며 굵은 모래를 힘껏 움켜쥐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주위를 돌아보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 파피오페딜럼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파피라고 불러주세요!" 그러자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환영 인사가 오고 갔다. "이제 힘이 나는가 보구나 얘야! 난 군자란이야 다들 군자 할배라고 부르지", "반갑다 난 모과나무지 목과라고 부르렴" "환영해요 난 백화등이야. 군자할배는 날 마삭이라고 부르는데 난 싫어. 꼭 백화라고 불러줘! 알았지?", "난 어제 봤으니 알지? 가고소앵초야 프리라고 해, 그리고 저기 두 그루의 분재, 붉은 소나무와 백송 보여? 말씀이 없으신데 아주 좋으신 분들이야 천천히 친해지도록 해봐! 그리고 수도꼭지 건너편 베란다엔 더 많은 식물들이 있어. 인사하기엔 조금 멀지만 대화할 시간이 있을 거야!" 꽃집에선 어디로 가게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예민하고 날카로웠는데, 이곳의 밝은 기운은 얼어붙었던 마음도 풀어지기 충분했다. 베란다 수도꼭지에서 에어컨 실외기까지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곳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게 좋은 이웃이 생긴다는 건 참 행복하다. 그런 이웃이 있는 것은 이곳이 살만하다는 것이고 우리와 동행하는 주인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꽃집에서 권력이 높고 부자 집안에게 간다며 잘난 척하던 애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무리 관리를 잘해준들 고고한 척해봐야 볕이 제대로 들지 않고 외롭게 있으면 감옥과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플라스틱 화분이라도 이 베란다는 내겐 천국이고 희망이다. 그리고 내가 꿈꾸던 Sercret Garden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