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백송
군자란을 군자할배라고 불러서 베란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프리가 모과나무와 소나무가 더 나이가 많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다. 이곳 베란다가 아니라도 밖에서 충분히 살 수 있는 나무인데, 사람 욕심에 크지 못하게 작게 키워진 분재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그들 몸을 파고든 철사 자국을 보고 숨이 막혔다. 그때 그들 아래 있던 어린 백송이 눈을 맞추며 쾌활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송이도 아니고 백송이도 아니고 백송에요. 하얀 소나무랍니다. 작년에 싹을 터서 이제 처음 봄을 맞게 되었어요." "오! 나와 같은 동갑내기구나! 반갑다. 파피라고 해" 프리처럼 격 없이 다가오는 백송을 보고 친구가 한 명 더 생긴 것 같아 기뻤다.
백송에게 소나무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친척뻘인 그가 백송이 싹이 날 때 들려준 넋두리를 말해주었다. 소나무의 먼저 주인은 장사꾼에게 속아 산 것에 종종화를 냈다고 한다. 여름날 바깥 창문을 열어두지 않고 켜둔 에어컨 실외기의 뜨거운 바람에 한쪽 가지가 말라버리자 작년에 이사하면서 버리고 갔다고 한다. 그 이야길 듣고 소나무의 겉만큼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섣부르게 위로할 자신도 없고 오히려 그가 눈을 맞추지 않는 것이 다행인 듯 시선을 둘 수 없었다. 그런데 주인 할아버지는 집으로 가져와 얽힌 철사도 풀어 주고 애착을 갖고 돌보고 있었다. 분무기로 솔가지 하나하나에 물이 잘 스며들게 뿌리고 동그랗게 생긴 것들을 화분 위에 놓아두는데, 내가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이자 백송은 그것이 소나무 영양제라고 알려주었다. 열 마디 말보다 묵묵히 속을 알아주는 할아버지가 멋져 보였다. 휑했던 가지에 솔잎이 나면 축하해 주리라.
생각이 씨앗이 되었는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모과나무에 꽃이 핀 것이다. 모두가 놀라워했다. 여태껏 열매는커녕 꽃을 피운 적이 없는 모과나무에 한송이 분홍빛 꽃봉오리가 맺었다. 꽃송이가 활짝 벌어지는 것을 보며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꽃을 피웠군요.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에요" 군자할배가 큰 소리로 말했고 모두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오랫동안 침묵으로 있었던 모과나무가 감격스럽게 말했다 "아! 정말 기뻐요. 내가 꽃을 피우다니...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는데 말없이 지켜보던 소나무가 나서며 "정말 축하하네. 사십 년 만에 꽃이 피다니 그간 얼마나 말 못 할 고생을 했는가? 자네 메마른 울음 벗어버리고 이젠 크게 웃어보게나! " 난 소나무가 저리 말을 잘할 줄 몰랐다. 거실에서 모과나무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크게 불렀다 "여보 모과나무에 꽃이 폈어요. 와서 좀 보세요" 그 말을 듣고 안방에서 할아버지가 달려오셨다. "내가 잘 못 키워서 꽃을 못 보나 했는데, 가장 아름다운 모과 꽃을 오늘 보네" 하며 크게 웃으셨다.
내가 가만히 소나무의 휑한 가지를 보니 무언가 푸른 싹이 나오는 느낌이 들어서 소나무에게 말했다. "소나무님! 마른 가지에 싹이 올라오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어머나 메마른 가지에 솔잎이 돋아나네" "축하드려요" 멀리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축하의 물결이 밀려오자 소나무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크흠.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네는 참 잘 어울리고 눈썰미가 좋네! 난 적송일세" 말문이 트인 적송과 불편하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과나무가 "사람들은 날 보고 세 번 놀란다고 해. 못생겨서 놀라고 향기로와서 놀라고 맛이 없어서 놀란대. 오늘 난 두 번째 놀라게 했는데, 사람이 아닌 내가 놀란 것 같아!" 하며 크게 웃었다. 난 속으로 말했다 '세 번째 놀랄 일이 생기면 좋겠다고' 응어리진 듯 뭉쳤던 가슴이 뻥 뚫리며 구름 없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