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장상의 씨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곤 공장처럼 찍어내듯 키워내진 화원과 꽃집이 전부라서 마음 편해진 이 베란다의 식물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수돗가 옆에 맷돌을 감싸고 있는 풍란에게 그리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걸 보던 프리가 말했다. "저 친구는 콧대가 높아요. 자기는 고고한 동양란이라며 이곳이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요. 저 친구와 말도 붙이지 못했다고요." 화원에서 같이 자라던 동양란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인들이 칭송한 사군자라며 기세 당당했었는데, 하룻강아지가 범이 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인들은 난초에게 제왕이나 꽃다운 벗을 느낀 것이지 난초가 제왕이나 벗이 되는 건 아닌데도 그리 생각한 것에 어이가 없었다. 황당해하는 날 보며 프리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보죠" 찡긋 웃었다.
군자할배와 프리 그리고 나 또한 이 땅이 고향은 아니지만, 그것이 토박이와 이방인을 나누는 장벽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우리를 갈라놓는다. 남아프리카가 고향인 군자할배는 자기 고향에는 카프라(caffra)라고 이름 붙여진 식물들이 많다고 했다. 김, 이, 박처럼 흔한 성도 있으니 그런가 했는데, 카프라는 이교도라는 뜻이란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아니니 그걸 구분 짓는데 식물 이름에도 그걸 붙인 것이다. 하긴 벌레에도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붙이는 서양인들이니 대수롭지 않게 들리기도 하는데, 군자할배는 그 일에 제법 분노했었다. 사람들이 나눈 격에 따라 장단을 맞춰서야 되겠냐며 토로했다. 나도 '그래 그건 아니지' 고개를 끄떡였다. 그 일에 무심했던 학자들도 카프라 학명을 쓰지 않기로 했다는데 우리끼리 서로 차별해서 사람보다 못하다는 소릴 들어서야 될까? 사실 나 또한 우리 식물이 사람 보다 먼저 이 땅에 뿌리내렸다는 작은 긍지가 있기에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편안한 온실에서 자란 우리가 향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더 슬프다. 보이는 아름다움은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시련 속에서 간절함으로 버텨낸 모습은 아니다. 설령 나라도 그런 시련 속에 던져진다면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꽃대가 꺾였던 얼마 전 기억을 떠올리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그까짓 것 견디면 되지"하고 말은 쉽게 뱉어낼 순 있어도 그 무게를 견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올 가을을 마지막으로 떠날 프리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대단하다 싶었다. 우리의 어머니는 땅이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속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이별은 내 안에 살아있는 씨앗이다. 그 씨앗은 내가 떠나면 땅속에서 다시 만남으로 태어난다. 사군자를 칭송했던 문인들 마음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난초를 보며 꽃다운 벗을 떠올리고 가슴에 그 꽃을 키웠을 것이다. 난 오늘 프리를 내 가슴속에 꽃다운 벗이라고 생각하고 씨앗을 심는다. 이제 그녀는 내 안에 자라는 왕후장상의 씨앗이 되었다.
고고하게 보이려던 풍란은 창문 틈에 스며든 겨울 한기에 뿌리가 얼어서 꽃을 제대로 피워내지 못했다. 이곳보다 살아내기 힘들다는 고향 바닷가였다면 태풍이나 추위가 찾아와도 오히려 견뎌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가 올해 꽃을 피워내지 못했어도 향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시련을 견뎌낸다면 그 모습이 바로 향기가 된다. 나도 프리도 꽃이 좋아 친해진 것이 아니니까. 어쩌면 그가 지금 시련을 넘어선다면 좀 더 성숙하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오면 지금보다 훨씬 가깝게 지내 수 있을 거라 상상 속 나래를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