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이젠 내 무기
초등학교 6학년은 내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내 인생의 파편이다. 그때 나는 왕따였다. 당시 내 반에는 키가 크고 당찬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살만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그 아이가 한 행동은 그저 아이들에게 했던 나쁜 장난 정도로 여겨지고 끝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참혹한 기억이 되었고 떠올리고 싶지 않아 몇 십년을 마음 속에 자물쇠를 걸고 닫아놓은채 지냈다. 그 아이는 나에게만 나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반 아이들을 돌아가며 한 명씩 따돌렸다. 그렇게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이 되고 나는 내일이면 내 친구의 적이 된다는 느낌으로 배틀필드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밥을 같이 먹을 친구가 없어서 혼자 먹어야 했던 그 날의 느낌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에 식은 땀이 흐른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 혼자 따로 앉아 모래알같은 밥을 씹었던 기억. 학교가 파하고 청소중인 교실의 칠판에 그 아이는 나에 대해 그린 악의적인 그림을 그리고 깔깔거리며 웃었고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그녀와 함께 낄낄거렸다. 세상에 내 편은 없어 보였고 매일 아침 학교에 가는게 힘들었다. 삼남매를 돌보느라 바쁘고 부족한 살림을 챙기는 부모님께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나혼자 삭힌게 1년이 넘었다. 그런 나에게 자존감이나 자기효능감 따위의 이야기는 사치였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나의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학교에 가는 일은 친구들은 만나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열심을 당긴 건 중2 때 짝을 만나고부터였다.
나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변변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학교는 그저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시험 기간은 학교에서 빨리 마치는 날이라 좋았다. 공부와는 사이를 멀찍이 띄워놓고 살았던 날들이었다. 그나마 영어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어서 그 시간만은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날을 기억한다. 중학교 2학년의 마지막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짝은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발랄한 여자아이였다. 악의가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가다 나에게 던진 한마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너 공부 못하잖아.”
난 스스로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고 직접적으로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시험 성적에 안달내지 않았기에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낙천적이고 가볍게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다르게 보았다. 내가 나태하고 부족해 보인다고 나를 느끼게 만든 그녀의 한마디가, 그 결핍감이, 내 공부 방아쇠를 당겼다. 난생처음, 시험 기간이라 문구류와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갔다. 그리고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했다. 전과목 평균 80점이 되지 않던 나의 성적은 단숨에 90점 언저리로 뛰었고, 기말고사에 과목 평균 89.9점으로 성적우수상을 받지 못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고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의 담임 선생님은 당시 가정 교과를 담당하셨다. 당시 주머니 만들기는 기말 가정 교과 수행평가였다. 나는 타고난 똥손으로 반 아이들이 90점을 모두 가뿐히 넘을 때 70점을 겨우 넘겼었다. 그 때문에 가정 점수는 나의 기말고사 과목 평균을 끌어내리는 일등 공신이었다. 나의 담임 선생님은 매우 좋으신 분이셨다. 당시 불화가 있던 나와 아빠의 사이에 접점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성적우수상 앞에서 그녀는 나에게 의외의 말을 들려주셨다.
“혜경아, 성적이 많이 올랐네. 이렇게 되는거면 가정 수행평가 끝나고 선생님한테 한번 찾아오지 그랬어. 수행평가 점수만 조금 더 나왔으면 성적우수상 받을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나는 선생님의 말이 고맙고 기분 좋으면서도 뭔가 찝찝했다. 내가 그동안 발 담그고 살던 세상은 나에게 이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방법을 제시해 가면서까지 나의 비겁한 성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세상은 나 빼고 이미 이렇게 비겁하고 불공평하게 진행되고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렇다면 나도 그에 가담하는 것이 무슨 그리 큰 잘못인가 하는 윤리적인 회의도 들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3학년 진학 후 첫 번째 중간고사에서는 반에서 2등을 했다. 학기 초라 나를 모르던 친구들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공부에 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처음 만난 선생님들도 나에게 이유없이 좋게 대해주셨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나는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공부 방아쇠를 당겨준 건 영어였다.
당시 내가 재학 중이던 중학교는 그해 원어민 강사 시범 교육 선정학교였다. 수업 시간과 방과 후에 원어민 강사를 원 없이 만날 수 있었다. 1990년대에 국적을 불문하고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파란 눈에 금발의 원어민이 우리 학교에 있다! 나는 그즈음 한창 팝송에도 빠져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미국인 선생님을 붙잡고 괴롭혔다. 하루는 당시 유행하던 ‘Barbie girl’의 팝송 가사를 선생님께 물어봤다. 미국인 Wendy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이 노래를 듣지 않는 게 좋겠다.’ 지금 그 팝송의 가사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아주 선정적이고 노골적이다. 하하. 그래서 아직도 나는 그 의미를 알려주려던 선생님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방과 후 원어민 영어 수업에는 또 다른 미국인 여자 선생님을 만났다. 하루는 그녀를 내 집에 초대했다. 엄마가 사과를 건네주며 ‘애플, 애플’ 했다. 그녀가 웃으며 사과를 가져갔다. 너무나 신기하다. 영어라고는 단어 몇 개 밖에 말할 줄 모르는 우리 엄마랑 미국에서 온 노랑머리 파란 눈 선생님이랑 대화가 통했다. 마음이 통했다. 흑백 티비였던 나의 세상이 컬러 티비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어가 이런 거라면 더 더 잘하고 싶었다. 정우상가 지하에 있는 그랜드 문고로 달려갔다. 닥치는 대로 영어와 관련된 것들을 모조리 사고 싶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Marriam Webster라는 작은 포켓 영영 사전을 집어 왔다. 그리고 그 영영사전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봤다. 예를 들어 모르는 영어 단어 ‘vast’를 찾았다. ‘of very great extent or quantity; immense’ 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대단히 많은 정도나 양’. 가만 보자. ‘immense’는 뭔고? 그렇게 또 ‘immense’라는 단어를 찾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르는 단어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여 나왔다. 영영사전은 영어를 낚는 낚시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영사전을 끼고 살았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영어를 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영어에 홀딱 빠져 있었다.
또 그 당시 내 처음 이메일도 만들게 되었다. 보석을 뜻하는 'gem'을 넣어서 만들고 싶었으나 이미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어 결국 'gemee'가 되었는데 친구들은 내 아이디를 개미라고 놀려댔다. 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외국어로 이어지는 세상과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세상. 두 개의 멋진 신세계인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에 가게 되었다. 당시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고 계셨던 삼촌 댁에 한 달 동안 가게 되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외국인 주거단지에 살던 삼촌 댁에서는 16살 내가 여태 보지 못한 것의 총천연색 집합체였다. 그중에서도 나와 같은 나이이지만 옆집 식모를 했던 친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영어를 못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주인의 말을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옆집 이모가 화장실을 닦으라고 하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티비만 멍하게 보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수영장을 보고 옷을 다 입은 채 뛰어들기도 했다. 그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경비원 손에 끌려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수영장 밖으로 나오던 모습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나와 분명 같은 나이이고 내 친구들은 지금 한국에서 수능 준비하느라 한창인데 그녀는 이곳에서 남의 집 일을 하며 나와 같은 나이를 살고 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어떻게 살지, 그녀는 이곳에 남아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잘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내 일이 아닌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나를 휘휘 저었다.
2001년,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재학 중이던 교대에서 외국어 강의하던 션텔이라는 캐나다인 선생님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낯선 타국에서 외롭던 그녀와 교대 체질이 영 아니었던 나는 서로 베프가 되어 4년 대학 생활을 외롭지 않게 보냈다. 2005년 교사가 된 후에도 나의 영어와는 인연은 끊어지지 않아 줄곧 영어 전담 교사를 했다. 다양한 국적의 원어민 교사들과 수업을 많이도 했다. 그중에서도 2008년 울진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만난 재클린은 나의 인생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내가 첫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 한국을 찾아주었다. 한국인보다 더 정 많은 흑인 언니였다. 그리고 작년 드디어 2023년 재클린이 출장차 서울에 오게 되었을 때, 우리는 20년 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한참을 울었다. 이렇게 결국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만나야 할 인연은 어떻게든 이어지나 보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주말이면 서울에서 창원까지의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매번 4시간을 달려 한달음에 나에게 왔다. 주말마다 머물며 똥손인 나를 대신해서 내 딸들의 머리까지 땋아주었다. 그녀와의 우정은 내 가족으로 범위가 넓어지고 또 깊어졌다. 이러니 영어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어는 나를 따뜻한 사람과 더 나은 세상으로 늘 이끌었다. 이러니 영어를 놓을 수가 없다.
영어는 내가 국제학교에서 일할 수 있게 했고,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게 해주었으며, 여행을 갔을 때, 학교에서 여러 가지 업무 중 영어업무와 원어민 관련 업무를 할 수 있게 했다. 언제나 나에게 기회를 가져 준 행운의 여신이었다.
한때 크고 멀게만 보였던 그 여신이 지금은 내 차 보조석에 앉은 친구처럼 편안하고 다정하다. 그건 내가 그녀를 자주 만났고 어울렸고 잘 알게 되어서 일 것이다. 그 시간이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편안함을 가져 준 게 아닐까? 한 번에 그녀를 나의 무기로 장착하고 휘두르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내 옆에 데리고 왔다면 지금처럼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녀와 사이좋게 지내며 나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행운의 여신으로, 때로는 뮤즈로, 때로는 나를 위로해 주고 웃게 하는 존재로 남게 하고 싶다. 안될 것도 없겠지?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말이다. 오늘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음악을 듣고, 책을 펼친다. 그녀가 함박웃음을 짓고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내 가슴마저 콩닥콩닥 뛰게 하면서. 안녕, 오늘도 잘 지내보자 영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