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이야기

전동(後)

by 지인

한동안은 조용한 날이 계속되었다. K는 더 이상 세탁기를 가지고 다른 환자들과 신경전을 벌이지 않았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화장실 청소도 거의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어수선하게 무너진 병동 분위기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환자들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K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래서 K는 몇몇 환자들과 간단한 대화 이외에는 따돌림을 받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내가 쉽게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K는 고립된 자신의 처지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만 그동안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자신이 굳이 손대지 않아도 무리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조금씩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분명히 무엇인가 일을 하면 기분이 좀 낫다고 했었다. 그래서일까. 원래도 말수가 적었지만 요즘 들어 말수가 더욱 줄어든 것 같았다. 표정도 굳은 채 펴지지 않았다. 한숨이 늘어난 것 같았다. 언제든 폭발할 것 같았다. 흡연을 하며 간신히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나는 늘하던 것처럼 요즘 좀 어떻냐고 물었다. K는 잠시 담배를 바라보다가 별일 없다고 말했다. 무언가 더 말할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할말이 있어 보이는 것이 신경이 쓰였지만 더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는 정말 자신이 빠져도 병동이 잘 돌아가는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도 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가 일하지 않는 것을아쉬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는 것일까 자신 없이 잘 돌아가는 병동일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는 것일까. 스트레스와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이 점점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에게 이전과 같이 세탁이나 분리수거, 화장실 청소를 마음대로 하게 둘 수도 없었다. 다른 환자들의 이용을 막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본들 K의 상태가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다행히 다른 환자들과 직접적인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긴장된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을 하면 기분이 좀 낫다는 말이 걸렸다. 단순히 여러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는데서 오는 만족감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인가 자신의 역할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은 병원이다. 그의 역할은 이곳에서 치료를 받아 회복하는 것이지 병동 환경 미화가 아니었다. 그가 하려고 하는 것들을 위한 직원이 이미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그의 개입은 사실 별 도움이 안 되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겨 다른 환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쉽게 그의 바람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K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것일까. 정해진 시간에 세탁기를 돌리고서는 새벽에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말리는 직원들에게도 점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거칠어졌다.


병동의 환자들의 긴장에도 점점 한계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처럼 K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K의 면전에 대고 욕설과 삿대질을 하는 환자들도 나타났다. 그때마다 직원들이 중간에 개입해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말렸다. K와 간간히 짧은 대화라도 하던 환자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그는 안하무인적인 태도로 움직였다. 나 역시 어느 순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게 '하지 말라'는 말을 그에게 내뱉고 있었다.


결국 일이 터졌다. 평온하게 생활하던 B와 싸움이 일어났다. 다행히 물리적으로 큰 충돌은 없었지만 K의 전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많은 환자들이 K와 같은 병동에서 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알려왔다. 무엇인가 조치가 없으면 K의 안전이 위태로울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지금까지 조용히 그를 지켜봐 오던 이들이 감정을 드러낸 것에 이제는 임시방편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닌라는 것이 확실했다. 더 이상 K와 환자들의 관계를 개선해 볼 상황이 아니었다.


K는 전동을 가게 되었다. 결정이 나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실행은 빨랐다. K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입을 닫고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그의 짐 챙기는 것을 지켜보며 많이 아쉬웠다. 무력감도 느껴졌다. 내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 나의 역할은 어땠어야 했을까.


우리는 정말 그를 치료하는 것에 도움이 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조용히 격리만 하고 있었던 걸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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