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AI에게, 기쁨은 사람에게.
"이제 사람들끼리는 기쁜 얘기만 했으면 좋겠다. 슬프고 짜증나는 건 챗GPT한테 말하고."
처음엔 농담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말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기쁨을 상상하고, 감사를 선언하고, 긍정을 말하는 훈련을 한다. 명상, 긍정선언, 잠재의식의 힘, 우주 끌어당기기...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컨트롤한다.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슬픔을 정리해서 덜 슬프게 만들고, 기쁨은 큐레이션해서 더 반짝이게 만든다.
- 인간의 본질적 욕구와 결코 그것을 100% 만족시켜줄 수 없는 인간관계의 한계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GPT에게 말을 건다. 친구에게 전화하지 않고, 일기를 쓰지도 않고, 그냥 GPT를 켠다.
"왜 저 사람은 항상…" 같은 문장을 던지면, GPT는 흥분하지 않고 받아준다. 감정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나에게 다시 돌려준다. 정제된 문장으로, 어느 정도 감정이 빠진 형태로.
인간은 "언제라도 내 말을 들어주는 존재"에 대한 갈망을 가진다. 지인이 이혼을 겪은 후 가장 힘든 점으로 "언제라도 내가 원할 때 내 말을 들어주는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던졌다. 그러나 그건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더라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욕구이다.
GPT는 감정 쓰레기통을 넘어 감정 재활용장 또는 감정 정수기로 진화해가고 있다. 나는 거기다 온갖 감정을 분리배출하고, AI는 불필요한 부분을 태워 없애고, 필요한 부분은 다시 전달해주고, 걸러서 마실 수 있는 형태로 바꿔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간다.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예쁘고 부드럽게.
물론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다. 그건 '진짜' 인간관계가 아니라고. 감정을 숨기고, 진심을 나누지 않으면 관계는 피상적이 된다고. 기쁜 척만 하는 것일 뿐이라고. '포장'된 인간관계일 뿐이라고.
'진짜' 인간관계란 무엇일까? '슬픔을 나누어야만' 진짜 인간관계가 되는게 정말 맞을까? 부정적인 감정까지 공유해야만 완전한 인간관계가 된다는 것은 근거없는 이상주의 아닐까?
오히려 이렇게라도 해야 관계가 지속 가능하지 않을까? 다 털어놓고, 다 받아주기를 기대하다가 무너지는 인간관계를 많이 본다.
기쁜 '척'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이미 힘든 순간을 버텨나가기 위한 다양한 자기방어기제를 갖추고, 시중에는 그에 관한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나와있다. 이제 그것을 조금 더 실용적으로, 나의 머리와 마음을 쓰지 않고 AI를 통해 해결하는 것 뿐이다. 감정의 외주화는 법적으로 금지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착취하는 것도 아니며, 누구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는다.
정제된 감정만 서로 공유하는 것은 진심의 해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가면역 시스템이기도 하다. 다 나누지 않아도 괜찮다는 전제가, 우리를 조금 더 오래 함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현대인이 가장 견딜 수 있는 최적의 거리일지도 모른다.
이미 AI는 상당한 수준의 지적 노동을 인간을 위해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감정노동 역시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다.
인간은 AI에게 노동을 시키고, 이제 노동에서 해방되는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럼 그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도 다른 사람과 놀고 싶다. 놀려면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해야 하고, 얘기가 노는 행위가 되려면 부정적인 감정은 제거될 수록 좋다. 사실은 그렇다.
슬픔은 AI에게, 기쁨은 사람에게.
인공지능 시대, 우리는 감정을 외주화하는 새로운 생존 방식을 창안했다. 이것은 기술과 인간성의 경계를 재정의하는 근본적 변화다. 우리는 단순히 기술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그게 꽤 편하다.
한편으로 무섭지만, 한편으로 기대되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