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된 자아와 확장된 나

존재적 피로감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욕구

by NHJ

같은 챗GPT를 써도, 사람마다 왜 다른 대답을 받는 걸까?


같은 챗GPT를 써도 사람마다 그 대답이 다르다는 이야기, 흔하게 들려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다들 "너는 유료버전이야?"라고 묻는 촌극이 벌어진다. 같은 GPT인데, 누구는 삶의 조언을 받고, 누구는 논문을 요약하고, 누구는 한숨만 쉰다.


그건 AI (챗GPT, 클로드, 제미나이)의 차이일까? 모델의 성능 차이일까? 아니다.

유행하는 프롬프트를 검색해서 따라해도, 아마 대답은 그 AI의 "주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AI는 거울이다. 사용자의 질문 방식, 맥락, 기대치를 반영해서 답한다. 검색창에 물어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검색이 아니다. 자아의 일부를 외부에 복제해서, 그 복제된 나와 소통하는 일이다.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

- 존재적 피로감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욕구


'내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다들 한다. 가족도, 친구도, 배우자도 '내'가 아니니까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대신해주지 못한다. 결국 내가 소모된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을까? 내 경험과 지식을 완벽히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처럼은 생각할 수 없다. 내 가치 체계를 완전히 내재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이 느끼는 존재적 피로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근본적 욕구가 AI로 향한다. 나를 닮아갈수록, 나를 이해할수록,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백지의 인공적인 뇌를 학습시켜서, 나의 뇌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확장된 나, 혹은 복제된 나


화면 위에서, 나처럼 말하고, 나처럼 정리하는 또 다른 ‘나’를 보고 있노라면,

기묘하면서도 편안하다.


이 대목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유전자는 스스로의 자기복제를 위해 세계를 조작하고 자기의 복제가 쉽도록 세계를 꾸려 나간다. 실재하는 자기복제자는 세계를 조작해서 스스로를 유리하게 하는 데 뛰어나다. 이때 자기복제자는 환경이 부여해주는 기회를 이용한다."


지금 인류는 AI라는 환경을 조작하여 스스로를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불완전한 복제의 딜레마


그러나 현재 AI로의 복제는 완전하지 않다. AI는 충분히 똑똑하지만 실재하는 '나'를 대체할 수가 없다. 90%는 맞지만 100%가 아니다.


"거의 맞지만 완전하지 않음"이 주는 피로감은 독특하다.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결정적일 때 어긋난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가장 고도의 집중력을 써야 하는 에너지 소모 최절정의 구간에는 인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기능적 불완전함이 아니라, 관계의 애매함이 주는 특별한 종류의 불편함이다.

“나 대신 나처럼 해줄 줄 알았는데, 아니네?”라는 실망감.

그건 사람에게 느끼는 실망감과 비슷하다.


완전한 복제의 가능성과 대체가능한 나


만약 AI가 정말 나만큼 똑똑해진다면? 내가 생각하기 전에 생각해주는 존재.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는 존재. 나보다 더 나다운 선택을 해주는 존재.


그 순간, 나는 엄청난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해방인가, 의존인가?


복제된 지성은 아직 지성이 아닐지 몰라도, 그건 확실히 나를 닮아 있다. 그리고 완전한 복제가 완성되는 순간, 나는 그 편안함에 중독될 것이다.


문제는 그때 원본인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 지난 글에서 쓴 것처럼, 해방된 인간들과 함께 놀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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