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만족도의 다변수 비선형 최적화 모델

— 한계효용, 제약조건, 그리고 개인 기울기값의 동적 변화에 관한 고찰

by NHJ

Abstract

본 에세이는 인간의 행복 또는 삶의 만족도를 목적함수(objective function)로 하는 다변수 비선형 최적화 문제로 모델링하고, 변수 간 상관관계, 기울기값의 동적 변화, 제약조건의 역설, 자발적 태스크의 설계, 그리고 타인의 최적 파라미터 값이 자신에게 유효하지 않을 수 있음을 논한다. 인생 만족도를 설명하기 위해 수학적 개념을 차용한 것이므로, 수학적으로 엄밀하지 않을 수 있다.


1장. 목적함수의 설정: 행복을 Y라 할 때


우리는 매일 최적화를 하고 있다. 어떤 직업을 택할지, 어디에 시간을 쓸지, 무엇을 포기할지 — 이 모든 선택은 암묵적으로 어떤 목적함수 Y를 최대화하려는 시도다.


그 목적함수 Y를 '행복'이라 부르기로 하자. 엄밀히는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통상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며 산다.


Y는 단일 변수의 함수가 아니다. 돈, 시간, 관계, 건강, 자유, 인정, 의미 — 이 모든 것이 Y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변수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돈을 더 벌려면 시간을 써야 하고, 시간을 쓰면 관계가 줄고, 관계가 줄면 건강이 흔들린다. 변수들이 서로를 잡아당기고 밀어낸다.


그래서 인생의 방정식은 다변수 비선형 최적화 문제로 볼 수 있다.


선형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각 변수에 고정된 계수를 곱해 더하면 Y가 나오는, 깔끔한 세계. 그러나 삶은 선형이 아니다. 변수의 값이 달라지면 계수 자체도 달라진다. 그게 이 방정식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고, 동시에 흥미롭게 만드는 이유다.


2장. 기울기값의 정체: 취향인가, 상황인가


각 변수 앞에는 기울기값, 가중치(weight)가 붙는다.


Y = w₁·돈 + w₂·시간 + w₃·관계 + w₄·건강 + w₅·자유 + w₆·인정 + w₇·의미


(이해를 돕기 위해 방정식을 선형으로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비선형 함수다. 왜냐하면 각 기울기값 wᵢ는 상수가 아니라, 현재 상황과 맥락에 따라 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에는 돈의 기울기값이 크지만, 다른 순간에는 관계의 기울기값이 훨씬 크다.)


돈이라는 변수 앞에 붙은 기울기값이 큰 사람은, 돈이 1 늘 때 Y가 크게 오른다. 기울기값이 작은 사람은 별로 오르지 않는다. 같은 연봉 인상 앞에서 누구는 삶이 바뀌고 누구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 차이가 기울기값이다.


어쩌면 이것은 취향의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원래 돈에 덜 반응하도록 태어났다고. 그러나 취향이라는 것도 변화한다. 한계효용 이론을 적용하면 이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돈이 없을 때 1,000만 원은 삶을 바꾸지만, 이미 충분할 때 1,000만 원은 숫자에 불과하다. 즉, 기울기값은 고정된 취향이 아니라 변수의 현재값에 따라 동적으로 변한다.


만약 기울기값이 순수한 취향이라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상수여야 한다. 그러나 한계효용 이론이 보여주듯, 기울기값은 현재 상황(얼마나 충분한가)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기울기값은 취향이 아니라 상황의 함수다.


그렇다면 "나는 원래 돈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이 진짜 기질에서 비롯된 낮은 기울기인지, 이미 충분히 가졌기 때문에 포화된 기울기인지 — 본인도 구분하기 어렵다.


이 구분 불가능성이 인생 방정식을 더욱 비선형으로 만든다. 기울기값이 외생적으로 주어진 상수가 아니라, 변수값에 따라 내생적으로 결정되는 함수이기 때문이다. 방정식 안에 또 방정식이 있는 셈이다.


2.5장. 기울기값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추정되는 것이다


통계학에서 기울기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값이 아니다. x와 y의 관측값들을 무수히 뿌려놓고, 그 점들의 분포에서 최소제곱법으로 추정되는 값이다. 즉 기울기는 데이터의 축적으로부터 사후적으로 도출된다.


인생방정식에 대입하면 이것은 꽤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내 기울기값은 내가 살아온 경험의 산물이다. 돈이라는 x에 대해 행복이라는 y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 그 수많은 순간들의 점들이 쌓여서 비로소 "나는 돈에 이 정도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기울기가 추정된다. 태어날 때부터 고정된 값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 표본이 적으면 기울기 추정이 불안정하다. 경험이 적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기울기를 잘못 알 가능성이 높다. 부족한 데이터로 도출된 추정은 표본 편향(sample bias)을 가질 수 있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확신이 클수록 그 편향에 갇힐 위험이 크다.


둘째, 특정 구간에서만 데이터가 쌓이면 외삽(extrapolation) 오류가 생긴다. 돈을 별로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 "나는 돈에 관심 없어"라고 말하는 건, 데이터 범위 밖에서 기울기를 적용하는 오류일 수 있다. 경험해보지 않은 영역에서의 기울기는 추정이 아니라 추측이다. 돈을 별로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 "나는 돈에 관심 없어"라고 말하는 건, 데이터 범위 밖에서 기울기를 적용하는 오류다. (예: 연 3천만 원까지의 경험으로 연 5억 원대의 반응을 예측하는 것)


셋째, 관계 자체가 비선형인데 선형 기울기 하나로 요약하려는 것 자체가 모델을 잘못 설정한 것이다(misspecification).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곡선을 직선으로 근사하면, 어느 구간에서는 맞고 어느 구간에서는 완전히 틀린다.


결국 기울기값에 대한 과신은 위험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 이해는, 지금까지 쌓인 데이터 포인트의 범위 안에서만 유효한 추정일 뿐이다. 삶이 새로운 구간으로 진입할 때마다 — 더 많이 벌게 되거나, 더 많이 잃게 되거나, 더 많이 사랑하게 되거나 — 기울기는 다시 추정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고정된 값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데이터로 추정한 현재값을 아는 것이다.


3장. 제약조건의 역설: 한정된 자원에서의 삶이 더 선명하다


최적화 이론에는 역설이 있다.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최적화보다, 제약이 있는 최적화가 오히려 해를 찾기 쉬운 경우가 많다는 것.


제약조건은 탐색해야 할 해공간(solution space)을 좁혀준다. 변수가 취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고, 그 안에서 최적을 찾게 한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 쌍둥이 자매가 나온다. 10분 먼저 태어난 언니는 가난하고 바쁘다.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선명하다. 하루하루 당면한 과제에 한정된 자원을 모두 투입한다. 순간순간의 최적해가 명확하다.


반면 여유로운 동생은 어떠한가.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고, 부족함이 없다. 해공간이 무한히 넓어진다. 그 넓음 속에서 사람은 오히려 길을 잃는다. 이 무한한 풍요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풍요의 역설이다. 자원이 제약을 만들고, 제약이 변수를 줄이고, 변수가 줄어야 해가 수렴한다.


물론 이것이 가난을 미화하자는 말은 아니다. 제약이 너무 가혹하면 방정식 자체가 해를 가지지 않는다 — 제약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해가 없는 '실현 불가능한 문제(infeasible problem)'가 되어버린다.


핵심은, 적절한 제약이 수렴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최적화 이론에서 "전역최적해(global optimum)"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 절대적 최고값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전역최적해를 찾을 수 없고, 대신 "국소최적해(local optimum)"에 도달한다. 그것은 주어진 제약 안에서의 최고값이다. 제약이 있을수록, 그 제약이 명확할수록, 그 제약 안에서의 국소최적해에 더 빨리 수렴한다.




4장. 자발적 제약의 조건 : 나만의 기울기값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유가 생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제약을 설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늘리는 게 아니라, 하지 않을 것의 목록을 늘리는 것. 자율적으로 선택지를 좁혀서, 역설적으로 남은 변수들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말에는 가족과만 시간을 쓴다" 는 규칙을 만듬으로써 관계 변수에 의도적으로 집중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


여유로운 사람들이 스스로 제약을 설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귀족들이 파티에 정성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그 장면 — 귀족 여인이 파티 준비에 골머리를 쌓고, 하인들을 지휘하고, 손님 리스트를 몇 번이고 수정하고, 꽃 배치를 놓고 밤을 새우는 그런 모습. 보통 사람들은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사실 그건 스스로 목적함수를 하나 설정하는 행위다.


"이 파티를 성공적으로 열겠다"는 명확한 Y.


어떤 손님을 초대할 것인가, 어떤 음식을 준비할 것인가, 정원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음악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 갑자기 수십 개의 변수들이 생겨나고, 그 변수들 사이의 제약과 트레이드오프가 명확해진다. 거기에 자원을 집중 투입하면 방정식이 갑자기 단순해지고, 삶이 그 방향으로 수렴하기 시작한다. 고양감은 그 수렴의 감각이다. 한 달간 파티 준비에 몰입하는 동안, 다른 모든 고민들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와인을 수집하겠다는 결심도 마찬가지다. 어떤 빈티지를 살 것인가, 어떤 지역에 집중할 것인가, 언제 팔고 언제 마실 것인가 — 그 안에 작은 최적화 문제들이 계속 생성된다. 변수도 있고, 제약도 있고, 최적해도 있다. 스스로 방정식을 만들어서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발적 제약이 같은 효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제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제약이 수렴시키는 국소최적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따라서 자발적 제약이 의미를 가지려면 조건이 있다. 그 제약 안에서 다루는 것이 내 Y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변수여야 한다는 것.


와인 수집이 의미 있는 사람에게, 와인은 Y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다. 수집 자체의 과정 — 찾고, 고르고, 기다리고, 여는 것 — 이 "의미"라는 변수의 기울기를 높인다. 그 사람은 와인이라는 국소최적해로 수렴해 가고 있다.


반면 모방은 다르다. 옆집이 골프를 치니까 나도 골프를 시작한다면 — 그건 타인의 기울기를 내 방정식에 억지로 이식하는 것이다. 골프가 내 Y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않으면, 제약은 생겼지만 내 Y를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공허해지고 중도 포기하게 된다. 골프채가 창고에 쌓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너는 그 투자 왜 안 하니? 돈 버는데?"

이 말이 왜 공허한지 이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의 기울기값을 내 방정식에 대입하려는 시도다. 그 사람의 방정식에서 '돈' 변수 앞에 붙은 상수가 크다고 해서, 내 방정식에서도 그 상수가 같을 수는 없다.


변수의 구성 자체가 다를 수도 있다. 그 사람의 방정식에서 '돈' 변수 앞에 붙은 기울기값이 크다고 해서, 내 방정식에서도 그 기울기가 같을 이유는 없다. 변수의 구성 자체가 다를 수도 있다. 그의 기울기값이 그렇게 결정된 맥락 — 그가 가진 자원의 구성, 지금까지 소비해온 변수들의 역사, 그로 인해 형성된 한계효용의 현재 상태 — 이 모든 것이 다른데, 결과값만 이식하는 건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의 인생 조언은 어디까지나 참고값일 뿐이다. 조언은 대개 조언하는 사람의 방정식에서 작동한 해를 전달하는 행위다. 그러나 방정식이 다르면, 그 해는 내 문제의 답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타인의 국소최적해로는 수렴할 수 없다. 어떤 제약을 선택하느냐는, 어느 국소최적해로 수렴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Y를 실질적으로 높이는 변수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5장.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행복이라는 Y값을 최대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하다면 이미 모두가 최적해를 찾았을 테니.


다만 몇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첫째, 내 방정식의 변수를 파악하는 것. 어떤 변수가 내 Y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지. 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변수가 아니라, 실제로 내 Y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


둘째, 기울기값이 취향인지 포화인지 구분하려는 시도. 완전한 구분은 불가능하지만, 자원이 충분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 변수가 Y를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 그것이 진짜 기울기에 가깝다.


셋째, 불필요한 변수를 지우는 것. 해공간을 스스로 좁히는 것. 이것이 여유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역설적인 작업이다.


넷째, 내 방정식에서 진짜로 Y를 움직이는 태스크를 스스로 발주하는 것. 외부에서 제약이 오지 않는다면, 내부에서 제약을 설계해야 한다. 좋은 제약은 삶을 분명하게 만들고 고양감을 준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나쁜 제약은 모두가 옳다고 해도 허무하다. 그 차이는 단 하나 — 그것이 내 방정식의 변수인가, 타인의 방정식에서 빌려온 변수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 최적해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인지도 다시 물어야 한다. 최적화는 목적함수가 고정되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살다 보면 Y 자체가 바뀐다. 어제의 최적해가 오늘의 출발점이 되고, 새로운 방정식이 시작된다.


어쩌면 삶이란 최적해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방정식을 계속 다시 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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