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 스피노자
자기 동일성.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다는 인식 혹은
그 같음 자체를 말한다.
자기 동일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에 대한 탐구가 기억에서 출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반복을 통해 신체나 뇌회로에 저장되는 습관기억과
상관 연상 등 유사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기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외부 자극에 대해
신체 안의 습관기억(피아노 치기)과
정신적인 이미지기억(날짜를 갖는 연속성의 한 단편)이 상호 호출하고 참조하는 과정을 말한다.
즉 특정한 자극이 무엇이고, 무엇과 가까운지를 축적된 경험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풍선을 쥔 손처럼, 정신과 신체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인식이란 최초의 '순수 지각' 이후의
이 두 부류의 모든 기억에 대한 재인(re-cognition)이고,
나이테를 쌓아올려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 동일성에 대한 인식 또한 이런 조건 하에서 가능하다.
기억 상실증을 겪는 사람의 자기 동일성 인식은 제약되거나 불가능해진다.
정신과 신체의 긴밀함을 그는 ‘삶에 대한 주목’이라 표현했다.
삶에 대한 주목이란 유용성에 대한 집중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삶에 대한 주목이 없다면
목이 엄청 마른 상태에서 흰 색의 컵을 발견해도,
정신이 그 컵의 용도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하얗고, 원통처럼 생긴 어떤 물체로만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삶에 대한 주목의 관점에서
인식의 여러 층위를 가로지르며
삶의 지속에 충분히 적합한 기억들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능동적이고 의지적이어야 한다.
미국의 신경학자 다마지오의 저서에 따르면,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결정은 감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뇌의 감정중추가 손상된 사람은
분석이나 논리적 사고, 기억에 이상이 없어도
심각한 결정 장애에 시달린다고 한다.
기능적으로 보자면,
① 습관기억과 ② 이미지기억의 형성,
③ 삶에 대한 주목, ④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지향이
자기 동일성 인식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지는
⑤ 좋고 싫음의 감정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기 동일성의 조건 문제는
‘영혼은 무엇인가?’, 혹은
‘인공지능은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들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혹은 그것들과 같고도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의 자의식 문제의 경우
①은 인공지능의 태생적 강점이고,
② 또한 베이지언 머신러닝 등을 통해 충분히 구현 가능한 것이다.
③의 경우에도 유용성을 강조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
문제는 ④ 그리고 그것의 조건으로서 ⑤인데, 100분짜리 짧은 강의 안에서 이 논의는 결국 내재주의와 외재주의라는 관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으로 그치는 듯하다.
⑤의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해 봤다.
어떤 로봇에 아메바의 감정신호를 실시간 전송시키고 그것을 인풋으로 포함하는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총체는 아메바의 정신을 가진 기계 몸체가 된다.
이 존재는 외재주의 하에서는 물론이고 (만일 아메바 수조를 탑재시킨다면) 내재주의적 관점에서도 하나의 감정을 지닌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은 스스로의 기억의 회로 속에서 하나의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또한 연관되는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겠지만,
관대한 마음으로 그것까지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어떤 공허함은 남기 때문에 나는 필히 ‘영혼’의 문제를 넘보게 되고야 만다.
즉, 이 강의에서 논의된 조건들은 내게는 자기동일성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자기동일성을 우리가 지금 느끼는 방식대로 나타나게 하는 “양태의 조건들”로 보이는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자기 동일성의 핵, 존재의 가장 심부에서 모든 것을 최종 검토하고 좋고 싫음을 솟아나게 하는 수원지. 바로 그것이다.
내가 말하는 존재의 심부에 자리잡은 스캐너.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와 아펙투스가 자리잡은 물리적 토대 같은 것의 유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동적인 성질들 말이다.
예를 들면, 베르그송이 말하는 순수 지각의 순간에 그것이 활성화되는 어떤 것인지도.
이 문제에 관해 나는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해 왔고, 기만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황당무개하더라도 나 스스로 어떤 가설을 가지고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경향을 갖는다.
그 가설이란 앞의 글에도 썼던 “특수한 양자”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일전의 내 임사적 경험 외에는 다른 근거가 전혀 없는 순수한 망상의 산물이다.
즉 인식하는 존재에게는 물리적으로 깊숙한 어떤 위치에 아주 특별한 양자가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보여질 수 없고, 만져지거나 느껴질 수도 없다. 양자처럼.
어떤 자극이, 혹은 에너지의 고갈이나 불균형이 이 양자를 관측하거나, 교란시키는 경우 그것은 붕괴하면서 입자화된다. 양자처럼.
그 과정은 희고 밝은 점의 이미지를 마지막으로 남긴다. 입자처럼.
붕괴전에 우리의 존재 속에서 그것은 파동으로 존재한다.
양자처럼 그 파동은 신체의 각 부위를 관통하거나 넘나들면서, 신경계나 감각기관으로부터 오는 정보나 기억, n차 가공 및 축적 후의 것을 포함한 그런 것들의 온도나 좋고 나쁨 같은 것을 결정한다. 사실 결정과 판단이라는 대부분의 기능은 다른 신체 부위들로 이관되었을 것이나, 급한 경우, 혹은 처음인 자극에 대해서는 이 파동이 관여한다.
다행인 것은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측으로 붕괴된 파동은 전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붕괴 후 입자 상태를 초기조건으로 확산되면서 또 다른 파동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적 시간 축을 도입한다면 이 가설은 환생과 영생의 과학에 관한 것으로 확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영혼은 아마도 로봇과 인간에 구분을 두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