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을 느낀다 - 냉장고를 연다 - 빨간 캔을 발견한다 - 갈증이 증폭된다 - 따서 마신다 - 갈증이 풀린다.
현재들의 행위와 공간의 선형적 연쇄. 그 속에 시간이 있는가?
목마름을 느낀다.
살아오면서의 경험상 냉장고 안에는 마실 것이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나타나 냉장고를 감싼다.
빨간 캔을 발견한다.
기억이 빨간 캔을 감싸고 그 안의 내용물의 감각을 되살린다.
나는 부쉬맨이 아니므로,
즉 빨간 캔의 기억을 가졌으므로,
빨간 캔의 지각과 갈증이 증폭되는
순간의 사이에
빨간 캔의 과거가 소환되어 삽입된다.
캔의 차가움은 마시기도 전에
이미 머릿속에서
청량한 해갈의 기억을 불러와서는
미리 기대치로 심어놓는다.
예상밖의 맛이 나지 않는다면
미리 심어진 기대치에 의한
전기신호는 신경계에 머무른다.
내가 부쉬맨이었다면 ‘목말라서 냉장고를 열어 콜라를 찾아 마셨더니 시원해졌다’라는 현재들의 심플하고 매끈한 연쇄로서의 흐름처럼 느껴지는 시퀀스적인 시간 흐름은 판이하게 달라지고, 빨간 캔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상호 간섭도 꽤나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이것은 이지영님의 강의 영상을 통해 잠시 접한 시간-이미지라는 것에 대해 나 나름대로 이해해 본 한 단면이다.
들뢰즈는 <시네마>라는 저작에서 ‘무한을 되찾기 위해 유한을 거쳐가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예술은 ‘인간이라는 가장 좁은 유한으로부터의 탈중심화, 비인간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영화를 통해 사유하라!” 내돈내산인데, 꼭 그래야 되나?
영화나 영상매체는 인간의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을 잘도 보여준다. 인간은 대게 보고 싶은 것, 보게 돼 있는 것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목이 마르면 빨간 캔이 먼저 눈에 띄고, 젓갈 통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물가물한 것처럼(감각-운동 도식).
카메라가 냉장고 문을 연다면 다르다. 한순간에 포착하고, 다양한 앵글에서 구석구석을 클로즈업해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여줄 수도 있다. 영화의 화면은 냉장고에서 나와 주방을 비추다가 집 밖으로 나간 후, 아파트 단지, 도시, 육지와 바다, 대륙, 태양계, 은하, 다른 은하로도 순식간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다 갑자기 냉장고 문을 잡을 팔뚝 안의 혈관과 적혈구와 근섬유와 세포들 속으로 뛰어든 다음 목마름이 발생한 과거를 향해 혈행을 역류시킬 수도 있다. 이렇게 영화는 인간의 목적적 행동에 제약받는 지각의 한계, 거기로부터 유래하는 중심성의 억압이 깨뜨려지는 걸 아주 용이하게 보여주는 매체이기에, 철학자가 군침을 흘릴만한 분야라는 사실을 들뢰즈 또한 발견한 것이다. 눈알보다 렌즈를 통해 획득된 사유의 재료가 손상이 적다.
영화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매력적 주인공을 중심에 세운 탄탄한 서사의 이야기는 상업적 성공의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로서의 영화, 즉 철학자들이 필요로 하는 영화는 아니다. 왜냐면, 세계가, 우주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주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우주는 어떤 결말을 원하고 있는가? 내 상황(목마름)에 따라 지각을 제한받는(only 콜라 캔) 한계적 인간 너머 펼쳐진 저 광활하고 세미한 것을 우리는 아직 무한의 카오스라 부를 수밖에 없다. 거기를 향해 렌즈와 마이크를 들이대는 영화들도 있다.
들뢰즈는 철학을 '문제 해결'이라 봤다고 한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나의 멋진 해결 방법은, 더 큰 차원에서 그것을 감싸 안는 것이다. 교실에서 졸리고 힘겨운 학생들에게 “오늘 흘린 침은, 내일 흘릴 눈물”이라는 웃기는 급훈이 말하듯, 인지하는 시간의 차원을 확장시켜 주면, 5교시의 괴로움을 좀더 쉽게 넘어설 수도 있다. 완전한 지혜는 아니더라도 좀 더 커다란 지혜의 차원에서 목하의 상황을 보는 것이다. 정신승리나 도피와는 좀 다르다. 아무 인풋없이 문제를 비켜가는 게 아니라 문제의 실상을 좀더 옳게 파악하게 됨으로써 문제를 넘어서거나 미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는 인간 심판의 감각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비디오의 도움을 받기를 선택함으로써 판정시비를 둘러싼 팬들의 스트레스, 심판 매수의 유혹, 스포츠정신에 대한 불신 등의 문제를 전보다 아주 작아지게 만들었다.
인간이 하나의 가장 좁은 유한인데 반해, 세계는 무한한 카오스라 부를 도리밖에 없다는 점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그런 지혜의 차원이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체를 통해 보고 듣고 기억하고 내달을 수 있는 곳 너머의 것으로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지각을 확장하고, 날아갈 수 있다. 우리에겐 카메라와 드론과 챗지피티와 CG와 애니메이션과 화성탐사선과 보이저호와 양자역학이 있다. 그것들과 그 이후의 것들을 통해 우리는 행위-이미지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감-이미지, 지각-이미지,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를 향해 발디디며 인식과 사유를 넓혀볼 수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문제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더 많은 차원들을 확보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전복, 해체, 도전, 도약.
과학자는 도구를 발명하고, 예술가는 영감을 보여주며, 철학자는 그 방향을 내다본다. 들뢰즈는 탈중심화, 탈인간화, 비유기화에까지 그 사유를 밀어붙였고, 현재의 연쇄, 지나간 현재와, 닥친 현재, 다가올 현재들의 행렬로 인간 속에서 인식되는 통념적 시간의 구조마저 해체하고자 했다. 시간-이미지.
<진격의 거인>에 나온 ‘미래의 기억’이나 유미르와 미카사의 선택의 연결을 통해 생겨나는 순환 고리적 구조 또한, 완전히 새롭지 않을지 몰라도, 선형적 시퀀스로서의 시간에 대한 도전적 사유의 시도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주인공 에렌의 무지성화를 통해 탈중심화 공정의 첫 번째 과정에 대한 이미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전복이라는 관점에 주목하면 '나는 자유다. 너희들도 자유다'라는 대사의 의미가 더 넓게 펼쳐질 수 있겠다.
<진격의 거인>도 들뢰즈가 극혐했다는 '감각-운동 도식', 혹은 '행위-이미지'에 치중한, 사유를 좀먹는 클리셰적 상업 시네마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그렇대도 내게는, 세상에서, 사회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서 느끼는 괴로움, 내가 비극적 주인공인 듯해서 느끼는 고통의 해결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 함께 생각해 보자는 손 내밂인 듯도 싶다. 확장과 연장이란 적어도 호흡의 쾌적함으로 다가오는 자유의 감각을 제공하지 않나. 그리고 조사병단의 별명 또한 "자유의 날개"이지 않던가. 존재하는 한, 자유 너머에 있을 더 큰 자유만은 또 기대할 수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