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시네마,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베르그송
이미지는 지각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실재이다. 그것은 형상/질료, 이데아/모상에서 후자를 차지하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진상 그 자체를 말한다. 실재는 우리의 지각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받아들였던, 받아들일 모습과 다르지 않은 정태와 동태로 존재한다. 미완인 것은 물질, 이미지가 아니라 항상 인간의 지각 자체일 뿐이다.
들뢰즈
대표적으로 인간의 지각을 제한하는 것은 감각-운동 도식이다. 욕망이나 목적에 제한되고 마는 지각의 중심성과 목적 지향적 선별이라는 한계.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지각은 인간의 신체 감관의 한계에 가둬질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뇌과학
기억은 대게 감각-운동 도식에 따라 지각된 대상들의 지위를 배분한다. 쉽게 말해, 내가 어떤 이유(대표적으로 욕망)에서 주목했던 장면, 단면, 순간은 오래도록 생생한 것으로 남기는 반면, 그 주변, 그 중심성에서 먼 것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둔다. 뇌과학자들이 밝혔듯, 뇌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약삭빠른 기관이라 그런 듯하다. 그리고 그 처박힌 것들의 존재를 발견해 낸 심리학자들이 붙인 무의식이라는 기표는 신비주의적인 것이 되고 있다.
문제
문제가 되는 것은 기억이 자기 동일성 형성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된다는 점이다. 감관의 한계와 지각의 목적 지향성으로 인해 실재로서의 이미지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왜곡된 채로 형성되는 것이 기억일진대, 그것이 나라는 중심을 만들고, 그 중심이 다시 지각을 통해 세계를 재단하게 된다는 것.
오답
틀린다는 것의 공포스러움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오답을 제시하는 사람을 두고 근대 이후의 의학은 정신착란이나 정신분열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치매에 대한 공포. 그런데 나를 만드는 것은 기억이고, 기억은 지각의 제한을 받으며, 지각은 왜곡될 운명이라면, 그로 인해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항상 나의 완전한 이미지에 닿을 수 없는, 말하자면 항상 오답인 무언가이다.
분열
시네마적인 지각을 통해 지각의 한계가 보완되고, 순차적으로 기억이, 나에 대한 이미지가 보완된다면 어떨까? 지각의 보완이란 생략된 장면과 시간들의 복원이라는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기에, 그것들을 재생시킨다면 나는 보완 이전의 기준에서 보면 점점 더 분열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 존재로 재인식될 것이다.
영화
다만 세계에 관한 것과 달리 나를 오브제로 하는 영화는 거의 없다. 매순간 동영상을 찍어둘 수도 없고, 염라대왕이나 예수님 정도가 그걸 제작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라는 기록 남기기 뿐이다. 그 기록을 되짚어보면 분열적이고 지속되는 존재로서의 나의 실루엣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만이 나의 관심사이다. 나의 좋고 싫음은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내 영혼의 모습.
경계
지각의 확장으로 일차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는 문턱의 위치와 높이가 달라질 것이다. 나아가 그 문턱은 나의 기억된 경험과 기억 안 된 경험들 사이를 지나, 내가 경험한 세계와 내가 경험 못한 세계의 경계 위에서 진동할 수도 있다. 내가 경험 못하였지만 상상하고 인정할 수 있는, 혹은 읽으며 그려본 세계는, 기억되는 한에서만 나를 구성할 수 있을까? 기억되지 않으면 그 경계 내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기억 여부가 그리 참조할 만한 문턱이 아니라면, 즉 기억을 배제하고, 경험의 시간성 혹은 직접적 축적 여부도 배제한 후, 경험의 가능성으로서의 간접 경험을 두고 고민하는 시점에서 나는 누구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