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4: 존재

by Zoroaster O

“영토적 배치물이 이 배치물을 탈영토화하는 운동에 휩싸일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기계에 시동이 걸린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제시하고 싶어하는 기계와 배치물의 차이이다. 기계란 탈영토화 과정에 있는 배치물에 삽입되어 배치의 변화와 변이를 그려내는 첨점들의 집합이다. 기계론적(mecanique) 효과는 없기 때문이다. 효과는 언제나 기계적(machinique)이다. 즉 배치물에 연결되고 탈영토화에 의해 해방된 하나의 기계에 의존한다. 우리가 기계적 언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기계의 효과들로, 바로 이것들이 표현의 질료에 포함되는 고름을 규정하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 633

혼재(상태, 결과, 효과)가 고름(작용,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름이 혼재를 설명한다고 했다(634). 그리고 위의 인용문의 뜻을 새겨본다면 고름이란 기계, 배치물들 사이에서 기계적 효과(변화, 변이)들을 만들어 내는 타고난 메커니즘이다. 기계는 자기 주변에 배치된 것들을 대상으로하는 저마다의 고유한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기계는 존재, 체제 같은 것들이며, 사람도 당연히 거기에 포함된다. 사람도 세상에서 기계로서 자기 주변에 놓인 이러저러한 것들에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의 작동방식을 발휘하여 고르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존재인 것이고, 그것을, 그것만을 존재의 본질이나 본성 같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고르게 함(고름)이라는 작동 자체만이 존재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배치물들의 혼재로서의 정지적 상태의 포착, 혹은 현재의 한 인간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신분적, 사회적, 물리적 상태들은 그저 배치물과 작동의 결과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진격의 거인>의 에렌이라는 기계는 예속을 파악하여 그것을 파괴하든, 풀어주든, 보호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의 증가를 향해 작동한다. 시조 유미르라는 기계는 예속시키든, 힘을 보태서 도와주든, 죽은 것을 살려주기까지 해서라도 중심을 향해, 유대를 향해 모든 것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르민이라는 기계는 안다고 잘못 믿었던 것 너머를 향해 주변 배치물을 밀어내는 기계이다. 물론 만화니까 존재의 본성적인 작동을 이렇게 단순한 문장으로 포착해 볼 수도 있겠고, 현실의 차원은 당연히 더 복잡할 것이다. 일단 배치들의 차원이 훨씬 다차원적이라서 그렇다. 책에서는 종에 고유한 배치, 종을 넘나드는 배치, 코스모스, 검은 구멍 등을 언급하고 있다.

에렌이라는 자유-기계는 벽안의 인류라는 배치 안에 있을 때는 미지의 적에 대항할 희망으로 떠올랐고, 벽 바깥 세계와의 적대 관계 속에서는 전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절대 악에 가까운 존재로 전락한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배치까지 뒤섞어버리고 나면, 결국은 증오의 원천으로부터 한 소녀를 해방시키고,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자기 희생의 효과를 낳는 존재가 된다. 무언가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아르민의 눈에 띄인 에렌의 모습은 이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왜냐면 자기와 인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부수고야 말겠다는 본연의 메커니즘을 거리낌 없이 발휘하고자 할 경우에만 그는 ‘진격의 거인’으로 변할 수 있었고, 나와 동료들의 하루를 더 살 자격을 놓고, 대결을 강요하는 잔혹한 세계 앞에 놓였을 때는 그 작동을 실현시키고자 ‘인간성’마저 버리고 야수적 존재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다. 결과로서의 효과는 이토록 상반되지만, 그 안에 유일한 일관성은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상태를 추구하는 힘과 그것의 작동 방식 자체로서의 실존이다.

이걸 감각-운동 도식이라는 비판의 수립 배경과 연결시켜볼 수도 있다. 기계라는 작동의 고유성이 선행하고, 효과는 배치물과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 어떤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기계가 자신의 작동을 조절하는 게 아니다라는 관점이다. 후자의 인과적 관점은 인간이라는 가장 좁은 유한 안에 우리의 세계 인식과 지각 능력을 가두는 한계적인 것이다. 감각-운동 도식으로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다만 유의가 필요한 점은 자유화라는 작용과 그에 따른 효과가 목적-결과의 인과론으로 착각되어서는 안된다는 부분이다. 즉 에렌에게 자유화는 지향이 아니라 “타고난 것”으로서의 무엇이라는 점이다. 어떤 경지의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 모든 지각과 리소스를 거기에 집중시키는 형태로 자신의 본질적인 것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이든, 그것보다 자유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라는 기계이고, 경우에 따라 인류의 편에서 싸울 수도 있고, 인류의 절대적인 적이 될 수도 있으며, 인간성을 버리게도 되는 것이다.

자칫하면, 범죄, 특히 이 작품의 생산국인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냐는 단편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물론 그 또한 틀린 것은 아닐 수 있다. 한-일의 역사적 배치에 놓고 본다면, 이 작품 자체는 어느 면에서는 다분히 그렇다. 그러나 내 인식의 지평이라는 배치 내에서라면, 혹은 그런 특정한 역사적 배치를 벗어나 다른 사유 공간에 놓인 순수 지각 산물로 이 작품을 바라본다면 이것은 인간이라는 좁은 유한을 넘어서는 하나의 예시적 방식을 어떤 ‘이미지’로 구성하여 보여준 좋은 철학 연습 교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천개의 고원>의 구절들과 <진격의 거인>의 장면들이 자주 서로를 끌어당기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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