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가난의 느낌

들뢰즈-과타리, 스피노자

by Zoroaster O

욕망은 필요들에 기대고 있지 않으며, 역으로 필요들이 욕망에서 파생된다. 필요들은 욕망이 생산하는 현실계 속에 있는 역-생산물들이다. 결핍은 욕망의 역-결과이며, 그것은 자연적·사회적 현실계 속에 공탁되고 설비되고 액포(液胞)화된다. 욕망은 항상 대상적 실존의[이라는] 조건들 가까이에 있다. 욕망은 이 조건들에 합류하고 또 뒤따르며, 이 조건들보다 오래가지 않으며, 이 조건들과 함께 이전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욕망은 너무도 쉽게 죽으려는 욕망이 된다. 반면 필요는 이 조건들의 수동적 종합을 상실함으로써 욕망을 상실해 버린 주체의 소원 정도를 나타낸다. 공백의 실천으로서의 필요는, 수동적 종합들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찾아가 이것들을 포획하고 이것들에 기생하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사람은 풀이 아니다, 사람은 오래전에 엽록소 종합을 잃어버렸고, 사람은 어쨌든 먹어야 한다 …….” 이런 식의 말들은 부질없다. 이럴 때 욕망은 결핍에 대한 저 비루한 공포가 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가난한 자나 빼앗긴 자가 아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나 빼앗긴 자는 자신들이 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욕망은 아주 적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이 적은 것들은 이들에게 남겨진 것이 아니라 이들이 끊임없이 빼앗긴 것이며, 주체의 심장부에서 결핍을 구성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대상성, 인간의 대상적 존재 – 그에게 욕망하기란 생산하기, 현실에서 생산하기이다 –를 구성해 온 것이다. …… 욕망은 주체 안에 있는 그램분자적 결핍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램분자적 조직화가 욕망에서 그 대상적 존재를 빼앗는다. 혁명가들, 예술가들, 견자(見者)들은 그들[=대상적 존재]이 대상적이라는 데, 그저 대상적이라는 데 만족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 욕망은 생산적 권력으로 삶을 껴안는다는 것을, 또한 욕망이 필요를 더 적게 가질수록 그만큼 더 강렬한 방식으로 삶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61~62

욕망은 필요한 것에 대한 마음도, 그것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게 들뢰즈의 생각이다. 그에게 있어 욕망은 내 주변에 놓여있는 것들로부터 생겨나는 무언가이다. 식물의 광합성과 같다. 욕망은 아주 멀리 있는, 동떨어진 무언가를 갑자기 갈구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빛과 물과 이산화탄소 양에 따라 산소와 포도당을 합성해 내는 과정과 같은 것으로 본다. 빛, 물, 이산화탄소가 있을 때 광합성이라는 작용을 일으키려는 것이 식물의 코나투스적 본성(= 욕망)이므로, 빛, 물, 이산화탄소는 그 본성의 조건인 대상적 실존들이다. 그리고 식물은 빛, 물, 이산화탄소를 어딘가에서 능동적으로 자아내거나, 끌어오는 게 아니라, 그저 주어진 것인 그것들을 나름대로 종합할 따름이다(수동적 종합). 빛이 없는 환경에서 식물은 광합성이 아닌 호흡 작용이라는 욕망을 일으킨다. 빛이 결핍되었다고 빛을 추구하지 않는다. 빛의 결핍이라는 공포에 떠는 일도 없다. 이처럼 욕망은 조건으로서의 대상적 실존들의 오고감에 따라 변한다. 한때 삶에 대한 어떤 욕망을 강하게 불러일으키고 독차지하던 조건들이 스러져가면, 욕망은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쉽게 변하기도 한다. 필요란 욕망의 역-생산물이라 했다. 즉, 필요를 많이 갖는 욕망이라는 것은 빛과 물에 집착하는 식물의 식생과 같은 것이다. 광합성이라는 욕망, 많은 빛과 물을 필요로하는 그 욕망이 어떤 식물을 독차지한다면, 빛과 물이 사라진 곳에서 그 식물은 죽음의 작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반면 필요를 적게 가지는 욕망, 오고가는 대상적 실존들을 그저 대상적인 것으로, 오고 가는 것들로서 받아들이며, 광합성, 호흡, 뿌리 흡수, <삼체>의 외계인 같은 가사상태 까지를 주변 조건에 따라 오갈 수 있는 존재들의 삶은 그만큼 더욱 강인하고 끈질길 것이다. 고로 결핍에 대한 외적 주입이나 내적 강박은 우리의 삶을 좀먹고, 약화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변변치 않은 독서에서 나는 이런 것을 관찰했다. 삶 속에 가장 깊이 잠겨 삶을 그대로 본떠 삶 그 자체였던 사람들은 거의 먹지도 않았고 자지도 않았고 재산을 가졌다 해도 아주 적게만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의무, 즉 일가친척의 존속이나 국가의 수호에 대해서는 아무런 착각도 없었다. …” 62(Henry Miller, Sexus 재인용)

어째서 미셸 푸코가 이 책 <안티 오이디푸스>를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윤리학책”이라고 소개했는지 그 면모를 조금 맛본다. 같이 놀기보다는 혼자 놀기가, 타인의 인정보다는 자기 긍정이, 자본주의적 줄서기 보다는 즉흥적 여행자가, 유기체 보다는 다양체가 필요한 것이 적은 욕망에 어울리는 삶의 표현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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