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안티 오이디푸스
"그대로 있었다면 어차피 군인으로 외지에 끌려갔을 거야" 하고 건장한 병사가 말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거나 아니면 죽임을 당했겠지. 우리는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았어. 나는 원래 농사꾼이고 이 친구는 대학을 갓 졸업했지. 둘 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고 죽게 되는 것은 더더욱 싫었거든. 당연한 얘기지만 말이야. 넌 어때? 사람을 죽이거나 또는 죽임을 당하고 싶어?" 하고 키 큰 병사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누구한테도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 "누구든 마찬가지야." 하고 키 큰 병사가 말한다. "아니 거의 누구나 다 그렇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고 '그래, 너는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아? 알았어. 나가지 않아도 좋아.' 하고 나라에서 친절하게 허락해줄 턱이 없지.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고. 이 일본에서는 도망칠 수 있는 장소 따위는 아무데도 없어. 어디를 가건 곧 발각되어 버리거든 뭐니 뭐니 해도 좁은 섬나라니까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여기 머물기로 했어. 여기가 머물 숨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거든." 307
공포와 분노. 반드시 어머니를 범하고 아버지를 죽이게 될 거라는 저주가 데려온 공포. 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거부한다.
내게는 유독히도 어머니의 따스함이 많이 그리운 시절이 있었으나, 그런 감정을 성적 욕망과 연결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럽다. 연결이라는 것 자체를 무의미화 할 정도의 부자연스러움이다.
아버지는 어느 정도 불편하고 어려운 존재이긴 해도 그가 나를 거세하려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죽이게 된다, 그리고 항상 팔루스의 상실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게 된다... 라니. 이 쪽도 매한가지로 말같지도 않았다, 솔직히.
의식에서 밀려난 영역에 무의식이라는 기호를 달아주고 그를 통해 그 공간들을 제3자의 인식의 영역으로 길어 올린 공로가 있지만, 그 공로가 다수자인 소수 혹은 국가('일본') 혹은 자본주의가 필요로하는 공포와 분노, 죽고 죽이는 절대적 적대관계를 정당화할 권리를 그에게 부여하는 것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고, 죽임을 당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원시의 어느 때라면 몰라도 지금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공통된 공감의 토대이다.
어렵지않게 얼마 정도는 죽여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야비한 자들이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 고안해 낸 것이 오이디푸스이고, 그 고안에 과학적 거짓 색채를 덧 입힌 것이 프로이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이디푸스는 사피엔스가 척박한 자연과의 대항 속에서 살아남으려던 시대에서 태동한 신화이고, 프로이트는 그 시대의 신화를 소수의 다수자를 위해 이 시대로 끌어온 관계 수로일 뿐인 것이 아닐까?
죽고 죽이는 것을 우리의 운명이라고 전제하느냐,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고, 죽이고 싶지도, 죽임 당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들의 공감각적 토대로 삼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은 분명 많이 다를 것 같다.
까마귀 소년의 도서관에서 고른 나의 다음 책은 그래서 <안티 오이디푸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