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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Jan 01. 2023

식탁이 돌아왔다

오래된 중고 가구들처럼, 우리는 튼튼해지기로 했다.

  부모님이 사시는 광주 집에는 두 달 만이었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 여기저기에, 녹지 못한 눈이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완만한 흰 봉오리가 드문드문 이어진 낮은 산맥이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동 입구까지 계속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꼬마들의 발길 한 번 닿지 않았을 그 눈이 신경 쓰였다.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자, 엄마가 두 손 들고 반기셨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 그 어깨 뒤로 보였다.   

  “우리 아들, 살쪘네? 한 번 안아보자!”


  현관에서 신도 못 벗은 채로 어머니의 환영을 받은 나는, 방에 가방만 던져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이 있었다. 별 무늬도 없는 평범한 4인용 갈색 식탁이었다.                

  “식탁 사셨어요?”

  “어... 어!”               

  

  뜸을 들였다가 내 눈을 피하시는 걸 걸 보니, 뭔가 숨기시려는 게 있었다. 식탁 주위를 빙 둘러보니 다리 곳곳에 하얗게 칠이 벗겨진 게 보였다. 이번에는 또 어디서 가져오신 걸까.

  "에이... 어디서 가져오셨어요? 하하."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서서 말없이 김치만 썰고 계셨다. 집 안에는 아버지께서 주워 오신 중고 가구들이 많았다. 폐업하는 식당에서 가져온 좌식 테이블과 의자, 일하시던 공장에서 교체한다고 내놓은 행거, 이모네가 이사할 때 얻어온 컴퓨터용 2단 책상 등등. 형과 내가 마련해드린 TV나 냉장고 같은 전자제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버지께서 발품으로 마련하신 것들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식탁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얼마간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우리 집엔 한동안 식탁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뭔가 눈에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 덮인 식탁보도 그랬다. 여러 패턴의 분홍색 무늬가 큰 사각형 안에서 더 작은 사각 띠를 만들어가는 모양이었는데, 여기저기 실밥이 뜯어지고 튀어나온 게 꽤 낡아 보였다.                

  “교회 창고...”

  “엥? 거기에 이런 게 있었어요?”            



우리 거야….

  “네?”

  “이 식탁, 원래 우리 거라고.”

  내 기억에 2001년 이후로 우리 집에는 식탁이 없었다. 그해 겨울,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은행에 넘어갔다. 손바닥만 한 종이들이 온 집안을 빨갛게 물들였다. 합성 비닐 소재의 갈색 소파부터 오래된 3단 전축이 든 장식장, 정각마다 울어대던 뻐꾸기 집이 달린 좌종 시계, TV와 안방의 장롱 그리고 막 모서리가 말리기 시작한 노란 벽지까지. 종이는 붙기만 하면 그 작은 네모 칸으로부터 금지라는 색을 퍼뜨렸다. 이후로 15년 동안 우리 집엔 식탁이 없었다. 교회건물 지하방에도, 시골 식당의 단칸방에도, 10년 만에 얻은 임대 아파트에도.  


  집안에 주인 모를 가구들이 등장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기울어 버린 가세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아버지는 본래의 색이 바랜 것들을 마구 들여놓기 시작하셨다. 주워온 것이라고 해도 제법 쓸 만한 것들이었다. 좌식 테이블은 매끈하고 널찍한 게 웬만한 반찬이 흘러도 행주질 한 번이면 깨끗하게 닦여 식탁을 대신하는 데 충분했고, 컴퓨터용 책상과 의자는 15년이 넘도록 한 번도 삐거덕 거린 적이 없었다.       

     

    오래되고 튼튼한 중고 가구들이
집안을 채워가는 동안,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튼튼해지기로 했다.     

  형은 제대 후 서둘러 취직을 했고, 나는 봄이 오기 전에 군에 입대했다. 가족은 흩어져서 먹고 살길을 찾았다. 형은 편의점 라면에 만 밥, 나는 군대 밥,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요일에 교회 식당에서 남은 밥으로 살았다.  


  식탁은 창고에 버려져 있었다. 처분할 가치도 못 되는 것이었는지, 한 가족의 밥상마저 가져가는 건 너무했나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식탁은 살아남았다. 우리는 한 교회건물의 지하방으로 이사할 때, 방이 좁아 창고 구석에 넣어놨던 걸 깜박했고, 그렇게 쌓여가는 잡동사니들에 가려있던 식탁은 15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발길이 닿지 않는 가장자리의 눈은 녹지 못해서 얼음이 됐다. 야외 주차장의 주차 멈춤 턱 뒤, 단지를 둘러싼 산책로와 건물 사이의 잔디밭, 경비실 입구 문지방의 한편. 어쩌면 우리는 튼튼해진 게 아니라 세상의 언저리로 벗어나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흙 묻은 발자국이라도 피하고 싶었을 게다. 가난의 무게란 그처럼 녹아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다가왔었다.             

   

오랜만에 그리고 배부르게


  서울에서 출발한 형은 오후 늦게 도착했다.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우리는 사는 곳의 날씨를 이야기했다.     

  “서울은 눈이 좀 오긴 했어도 금세 녹아서 운전 걱정은 덜했어요.”

  “광주는 눈도 많이 오고 바람도 제법 불었어야. 아직도 눈 안 녹은 것 봐라. 체감온도는 서울 못지않게 추웠을 거랑게. 제주도도 장난 아니었제?”

  “아이고, 제주는 바람도 하영(많이), 눈도 하영. 사람들 공항에서 발 묶인 거 뉴스로 보셨죠양?”          

  가족은 말투가 조금씩 달랐다. 그 지역 사람들이 들었다면 분명 어색하다며 우스워했을 말투였지만, 그건 오래도록 다른 밥상에서 다르게 먹고 지낸 흔적이었다. 저녁상이 차려지고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식탁은 제법 튼튼한 게 쓸 만했다. 가장자리에 머물며 오래도록 튼튼해진 모두가 고마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나도 그리고 식탁도. 모두 고마웠다.       

  네 사람 앞에, 떡국이 담긴 네 개의 흰 사기그릇이 놓였다. 아버지의 식사 기도는 잠깐씩 멈추었고, 우리는 그때마다 숨을 삼켰다. 모두 숟가락을 들었다. ‘맛있다’고 엄마는 말했다.      


  나는 뜨거운 김을 불어가며 국물을 삼키고 흰 떡을 씹었다. 오랜만에 그리고 배부르게, 우리는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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