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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12. 2022

이 땅의 전문 답장인들에게

마음의 경영과 위로

  살다 보면 행운이라는 게, 온몸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며칠 전,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한 시인의 소개글을 발견했을 때가 그랬다.


마음의 경영이 이 생의 목표이므로
생활의 경영은 다음 생으로 미뤄놓고 있다


  1년이 넘도록 그렇다 할 벌이가 없는 내게, '생활의 경영을 다음 생으로 미뤄놓고 있다'는 시인의 말은 왠지 모를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음의 경영이라니. 어느 날 친구가 불쑥 찾아와 '야, 방이 이게 무슨 꼴이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이제부터 마음을 경영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어. 생활의 경영은 다음 생의 목표이니, 성실한 직장인인 네가 좀….'이라고 써먹을 만한 것일까 한다면 글쎄. 이상한 놈 취급하며 직장으로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설명할 수 없으니 '왠지 모를' 위안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책을 집어 들어 뒤표지 글을 살펴봤다.


  뒤표지엔 두 명의 소설가와 한 명의 시인의 추천사가 적혀있었는데, 그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한 소설가의 마지막 말이었다. '조심하시라, 이 여자! 당신 마음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 순간, 이건 또 무슨 도발인가 했다가도 '이 여자!'에 방점이 찍힌 나는, 심신이 건강한 남자로서 본능적으로 이 책에 더 끌리게 되었다.

  어떻게 할지 모른다니. 처음 보는 음식이 앞에 있을 때라면, 메뉴판의 사진을 보고 어떤 맛이겠거니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소설가의 말이란 마치 메뉴판에 다음과 같은 설명만 덩그러니 적힌 것과 같았다. '이 요리사! 당신의 미각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행운의 기운이 내 온몸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소설가의 추천사와 행운이 합심하여 내 지갑을 열었으니, 혹시라도 시인이 내 글을 읽게 된다면 한 가지 고민이 생겼을 게다. '소설가와 행운 중, 누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내가 알려줄 수 있다. '저를 구독해주시고 바로 옆에 제안하기를 눌러주시면 됩니다.'라고.




  앞서 내가 시인의 소개글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내 생각에 동의하는 한 구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위로란, 언제나 자기한테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형태대로 나오는 것이다.


 시인은 '유대감들'이라는 주제에 자신이 '감성과 직관으로 헤아린 마음의 낱말들' 중 일곱 개를 포함시켜 놓았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엄살'인데, 시인이 헤아린 것을 조금 요약해서 옮겨보자면 이렇다.     

  "엄살을 안으로만 삼켜온 자, 즉 평소에 엄살을 피우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엄살을 지나치게 안쓰러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로 필요할 때에만, 구조의 요청으로 엄살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앞에서는 부디, 습관이 된 푸념으로 엄살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한 번도 제대로 내비쳐본 적 없는 자신의 엄살이 독처럼 몸에 가득할 때, 그들은 누군가의 엄살을 들어주는 척하며, 자신을 포함한 두 사람을 함께 위로한다.

  늘 그렇게 옵션처럼 누군가의 엄살에 대한 위로의 타이밍에 더부살이를 한다. 평생을, 그렇게. 상대의 얘기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그 틈을 타서 운다. 누군가가 자기에게 그렇게 해주길 바라 왔던 것들을 엄살 잘하는 그자 앞에서 다 해준다. 위로란, 언제나 자기한테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형태대로 나오는 것이다."     

  

진짜로 조심하시라, 이 여자! 당신 마음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


  소개가 늦은 감이 있지만, 책의 제목은 『마음 사전』, 작가는 시인 김소연이다. 나는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이 책과 작가에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라는 텔레파시를 받았다. 그것도 시인에게서 말이다. 내게 시인이란 마음 안에 우주를 품고 살며, 한 시대를 비추는 순수한 촛불이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행운이란 이처럼 삶의 한 순간에, 내게 손을 들어주는 대상을 발견했을 때 찾아온다. 뜻밖에 그리고 눈물 나도록 감격스러운 그 순간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시인이 손을 들어 동의해 준, 위로에 대한 내 깨달음의 순간 또한 그랬다. '놀랍고 신기한 데가 있다'는 뜻의 '경이(驚異)'에서 '놀랄 경(驚)'자는, 말이 뒷발로 서서 위를 보고 놀라는 모습으로, 머릿속에서 그려보자면 갑자기 그 말이 무엇을 본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 육중한 무게를 인내하며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의 깨달음 말이다.

     

  내가 위로에 대해 깨달은 일은,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3년 전이었다. 먼저 편지를 제안한 건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광주에 갔을 때, 그는 자기 생일인 줄도 모르고 로스쿨 시험을 준비하느라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 매점에서 점심을 때우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야외계단으로 갔다. 나는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물었다. 친구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더니, 방금 뽑은 커피를 말 그대로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리곤 대뜸 물었다.     

 "제주에서 사는 건 어때?"

  "그냥, 그래."     

  "너도 그렇구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 편지를 하는 게 어때?"

  "그게 왜 그런 의미인 거냐!?"     

  "내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유도를 했던 친구의 키는 나보다 조금 더 클 뿐이었지만, 다락같은 체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내가 그 뒤에 서면 터럭 하나도 삐져나오지 못할 만큼의 몸집을 가진 그는, 거대하고 튼튼한 한 대의 탱크 같았다. 덕분에 중학교 시절 내 단짝이었던 그는, 존재감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었다. 나를 괴롭히려면 이 탱크부터 넘어야 할 걸? 하지만 그 압도적인 첫인상만으로는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친구는 누구보다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게 왜 그런 의미냐면, 종일 스터디 모임에 인터넷 강의, 문제풀이, 토익 준비까지 하고 집에 돌아와 누우면,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는 거야. 왜 그렇게 마음이 답답했나 싶었는데, 되돌아보니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은 아무도 돌보고 있지 않더라고. 공부하는 것 말고는 그냥... 사는 것 같더라."     

  공부도 중요했지만, 집에만 오면 쿵쾅대는 제 마음도 돌봐줘야겠다고 생각한 친구는, 그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공간은 편지밖에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왜, 싫어?" 친구는 툭한 목소리로 노려보며 말했다. "아, 아니." 이런.. 나를 지켜주던 탱크의 포신이 돌연 나를 향해있었다. 제주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의 편지가 도착했고 그때부터 우리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안녕, 친구’로 시작해 ‘너의 벗이‘로 끝나는 지극히 형식적인 편지였다. 안부를 묻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기분에 대해 써나가는 식이었다. 그러다 각자의 인생관이나 청춘을 붙잡고 싶은 간절함을 호소하는 꽤나 심도 있는 이야기로 이어졌는데, 그래서인가 우리는 소설 속에서 중년의 인물들이 하는 '자네'나 '그대'가 들어간 말투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조금 무게를 잡고 싶었던 거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친구는 일주일에 적게는 한 통에서 많게는 세 통이 넘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때마다 일일이 답장을 하다 보니, 나는 내 이야기보다는 친구의 편지에 댓글을 다는 식으로 내용을 채워가고 있었다. 예컨대 '자네가 추천한 김수영의 <거미>를 찾아 읽어보았는데 말이지..'나 '그대가 말한, 인생의 긴 달리기에서 내겐 받침을 뺀 게 얼마나 부족했는지, 기다리기 말일세.'처럼 말이다.

  그렇게 전문 답장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던 어느 날, 친구의 편지가 갑자기 끊겼다. 다시 시험공부에 매달리기로 한 걸까 싶었지만, 미리 얘기를 하지 않을 녀석이 아니었다. 해서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나는 독촉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문자도 전화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편지를 시작할 때 정했던 규칙이었다. 편지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서로에게만은 아무렇게나 소비되는 의례적 이야기 아닌, 마음속의 진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약속한 것이었다. 이제 그만하자는 내용이라도 좋으니, 친구의 편지가 도착하기만을 나는 기다렸다. 결국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친구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전문 답장인으로서 한 달 만에 도착한 편지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다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의 편지를 받고 나서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낸 뒤에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거기에는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았으니깐.


빈 편지지만 있었다.


  가혹했다.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한참 동안 나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편지지를 앞에 두고,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이유 없는 구타처럼 내게 다가왔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 내 머릿속을 때리고 또 때렸다. 나는 그저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한참 동안 편지지를 뚫어지게 보다 보니, 문득 줄만 그어진 그것에 뭔가를 쓰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답장이 아닌, 나의 속 이야기가 담긴 내 편지가 될 거였다. 답장을 바라는 마음도 담아서 말이다. 그래도 될까? 친한 친구인 척, 훌륭한 선배인 척, 좋은 상사인 척했던 그 사람들은, 정작 내 이야기를 듣고는 타박하기가 일쑤였다. “인마, 뭐 그런 걸로 그러냐. 내가 더 힘들어.” 자기들은 모르겠지만, 나만 아는 불행들이었다. 다행인 건, 편지지에는 그럴 입이 없다는 거다. 일단 그 점을 확실히 하고 나니, 용기가 났다. 나는 편지에 처음으로, 내 이야기로 시작하는 글을 적기 시작했다. 친구의 이야기에 다는 댓글이 아닌, 그의 마음을 위로하느라 생각했던 온갖 명언들이 아닌, 진짜 나만의 엄살을 말이다.


  빈 편지지에는 입이 없다. 대신 귀가 있었다. 친구는 내게 입을 닫고 귀를 보내준 것이다. 나는 모든 문단의 시작을 '나는'으로 시작해서 빈 편지지를 채워 나갔다. 그리고 친구에게, 자신의 귀를 보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며 편지를 끝맺었다.     


  시인이 엄살에 대해 정의할 때의 ‘엄살을 안으로만 삼켜온 자’는 곧 나였다. 어쩌면 그 출발점이 같았으니, 결론도 같을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답장밖에 쓰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줄 몰랐다. 그러니 먼저 내게 엄살을 이야길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삼켜야만 했다. 상대방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끊임없이 속으로 연습하며, 나는 잘 들어주는 성격이라고 자신을 속여 왔다. 그러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때에, 상대방과 함께 나를 위로했다. 많은 시간을 혼자 연습했을 내 이야기와 어쩔 수 없이 잘 들어주는 사람이 돼버린 전문 답장인의 내공이 담긴, 그리고 언젠가 제대로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해주길 기대했던, 그 위로를 말이다.


  내게도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바라 왔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는 전문 답장인인 나를 위로하기 위해, 빈 편지지를 보내왔다. 이젠 자기가 들어주겠다는 투명한 귀와 함께 말이다. 편지를 보내는 동안, 친구는 나보다 먼저 이걸 깨달았던 거다. '위로란, 언제나 자기한테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형태대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서러움은 바라는 것과 충족되지 못한 현실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뒤돌아보면, 우리에게도 바라는 것은 언제나 있었다. 그래서 서러웠다. 먼저 엄살을 떨어줄 사람이 나타나야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의 마라톤은 긴 달리기가 아니라 '기다리기'였다. 그리고 그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는 친구의 빈 편지지를 만났고, 위로에 대한 그 깨달음을 다시 확인해 준 『마음 사전』을 만났다. 자신이 헤아린 것으로, 나를 향해 두 손을 들어준 내 친구와 시인 김소연 님에게 감사드린다.     


  사람을 위로하는 울음통은 자기와 닮았지만 그보다 큰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내게 위로가 되어 준 마음의 경영이 이 생의 목표라는 시인에게, 그녀의 감성과 직관에게, 내 감각을 두드려 준 하늘의 기운에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추천사를 쓴 소설가에게, 빈 편지지와 귀를 보내준 나의 친구에게, 그리고 나처럼 어쩔 수 없이 잘 들어주는 사람이 돼버린, 이 땅의 전문 답장인들에게, 모두 행운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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