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레 꺼내놓는 마음
저는 아버지랑 참 많이 닮았습니다.똑같이 생긴데다가 말투도 꽤나 비슷하고,추진력이 좋다거나 하는 성격적인측면에서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그러나 정석적인 길을 걸으신 아버지에 반해 저는 참 많이 반항하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부모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던데,저는 회사생활을 해보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책임질 가정이 없었기에 퇴사를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었던 나에 비해 아버지는 몇십년을 꿋꿋하게 한 회사에서 일하시며 심지어는 굉장히인정받으셨으니,존경스러웠습니다.어릴 때는 이해가 안갔던 아버지의 행동들도 회사를 다니며 보니 그저 대단하기만 하더군요.아버지의 책임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고그 어깨에 어느정도의 무게가 실려있었는지 이제서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나라고 자식이 되어본 경험이 있는건 아니니까요.그런데 아버지를 보면 저 말이 어느정도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첫 부모의 역할 중에서도 첫 자식이었으니 감이 안 오는 일들이 많을 법 한데,사춘기 이후로 전 키우기 쉬웠다고는 말 못하겠으니 말입니다.비슷해서 그랬던건지,참 많이 대들고 싸우고 힘들어했는데 아버지는 날 위해 변하셨습니다.나이 오십이 넘으면 정신과 상담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변하지 않기 때문에.그러나 울고불고 소리지르고,집을 휙 나가버리고,큰 일들을 덜컥덜컥 저지른 후에 통보해버리는 큰딸을 위해 아버지는 말투도,생각도 이전과는 참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천성이 예민한건지,온갖 것들에 순응하기보다는 반항하고 스트레스 받아하는 딸을 이해하기 위해 가르쳐줄 것은 가르쳐주고,설득이 필요할 때는 설득이나 조언을,쉼이 필요할때는 기대어 쉬라며 늘 어깨를 내어주셨죠.
아버지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자 실패가 나 아니냐며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던 딸에게,죽고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며 우는 딸에게,입원해서 환청까지 들으며 난리를 치던 딸을 보며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시곤 했을지는 사실 잘 감이 안 옵니다.우직한 아버지가 이해하시기에는 나는 너무 쉽게 깨지고 세상을 못 견뎌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이런 나를 여전히 사랑해줍니다.
딸은 공주처럼 키워야 엄한 놈한테 휙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곤 했습니다.그러나 아버지의 든든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해보니 알겠더군요.등을 봐주는 사람이 있으며 지지와 응원,귀한 것을 대하는 듯한 사랑을 받으면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더 단단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요.딸이나 아들이나,모두에게 통용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내 아버지는 아직까지 우울증이라는 질병이 덜 알려졌을무렵 우울증으로 대학병원에 입원까지 한 나를 보고 참으로 아버지다운 방식의 대응을 하셨습니다.거의 모든 시중의 우울증 책을 에세이,이론서 가리지 않고 사서 읽기 시작하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이해를 못 하는 것이 당연한 질병을,본인이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거의 모든 책을 읽기 시작하신겁니다.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이제와 돌이켜보니 그것이 눈에 보이는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공황발작을 심하게 일으키는 내 손을 잡고 그 위에 떨어지던 아버지의 눈물에는 후회가 담겨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사실 난 아버지를 제대로원망한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감히 내가 아버지를 용서한다 말할 자격이 있다면,아버지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병원에서 밤새 내 손을 잡고 우시던 때에,그리고 내 합격 소식을 듣고 우시던 아버지를 보고 난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나를 탓하다 지쳐 괜스레 해보던 원망도 그 순간들 이후에는 없었다고 조심스레 전합니다.아버지께도 나를 용서할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소소한 것들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하면 박스로 구해주시거나,맛있는건 항상 꼭 내 접시에 올려주시고,힘들면 그냥 때려치라고 말씀해주실때도,나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함이 뚝뚝 묻어나는 선물들을 볼때도요.가끔은 내가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시기도 하고 내가 쓴 글들을 늘 읽어주시는 독자 중 한명도 아버지이십니다.여자라 못하는건 싫다며 운구나 제사때 고집을 부리면 편을 들어주시는 것도,하고 싶은거 하고 살라며 조심스레 말씀해주시는 것도 나의 아버지입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의 방식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내가 어릴 때 아버지와 나의 사랑의 방식이 달라 그리 많이 다퉜던건 아닐까 싶지만,돌이켜보니 알겠습니다.아버지는 항상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한 적도 있고 난 쓸모없다고 생각한 적도 참 많았습니다.해서는 안 될 말들로 대못도 많이 박았지요.그러나 겨우 나를 위해 여태 해오던 방식들을 전부 바꾸어 새로운 사랑의 언어를 쓰시고 이해가 안되면 외워서라도 알아주는 나의 아버지를 어찌 존경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빠,난 내가 아빠 딸이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