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거대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이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똑똑하고 야무진 딸,든든하고 재미있는 친구,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 등 상대방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덜 친한 사이일수록 쉬웠습니다.그저 그 사람이 원하는 내 모습만 보여주면 되기에 오히려 간단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발목을 잡더군요.내가 그런 사람의 형태에서 벗어나면 여태 받아온 사랑을 잃을까 두려웠습니다.그래서 더 완벽한 형태를 갖추어두려고 노력했고,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뭐든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더 단단하고 더 완벽해 보여야 이 모든 것이 유지될 수 있을것만 같았습니다.
장녀의 무게도 무시할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동생들에게도 각자의 무게가 있어왔겠지만,어린 시절부터 내가 잘 해야 동생들도 잘 된다,모범을 보여야한다와 같은 사랑과 기대가 담긴 말들은 가끔은 날 짓누르곤 했습니다.가족들의 기대는 컸고,그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었던 결과는 강박증이었습니다.틀린 말도 없고 날 생각해서 하신 말씀들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그러나 가끔은,나도 조금은 제멋대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눈치를 보다보니 눈치가 빨라진건지, 눈치가 빨라서 눈치를 보게된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와 같은 문제이겠지요.사람의 감정에 대한 눈치는 빨라졌고 그만큼 스스로에게 지우는 부담의 크기도 커졌습니다.나에게 가장 높은 기준을 주고 가장 채찍질하는 사람이 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스스로를 몰아치는 성격 탓에 힘든 것도 인지하고 있지만 고치기 쉽지 않더군요.
오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이 사람은 날 왜 좋아할까?하는 생각이요.사랑의 종류는 여럿이라고 생각합니다.우정도,가족간의 사랑도,형제자매간의 우애도,사제간의 정도,연인간의 사랑도 전부 다른 종류일뿐 사랑이지요.내 삶을 둘러싼 다양한 사랑들의 형태를 의심하고는 했습니다.상대방 탓이 아니라,나를 왜 사랑하는지 모르겠어서요.조건 없는 사랑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심지어는 나조차도 타인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경우가 있음에도 나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은 익숙치 않습니다.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생각보다는,이유가 없는데 날 왜 사랑할까,그 이유가 뭘까,하는 고민들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곤 합니다.
날 유치한 이유로 조건없이 사랑해주면 좋겠습니다.그냥 내가 울고 웃는 모습이 좋아서,내 감정의 다양함이 좋아서,보조개가 예뻐보여서 뭐든 좋으니 내가 연기하지 않아도 되면 좋겠습니다.다정한 내 주변인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가 자신이 없습니다.여전히 계산하고 눈치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탓인지,아직은 전부 보여줘도 괜찮으리라는 확신이 없습니다.생각보다 더 불안정하고,불안해하며,기복이 심한 내 모습을 전부 보여주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우울의 늪에 빠지고,별것도 아닌 것에 토라지고,또 별것도 아닌것에 다시 풀려 웃습니다.다른 사람들은 이게 내 장점이라 하지만,내 평생 소원은 감정이 무뎌지고 다채롭지 않아지는 것,생각을 안 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입니다.사소한 말 한마디에 하루종일 땅을 파기도 하고 지나치게 철학적이거나 깊은 생각으로 몇날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이런 나날들이 적어지면 적어도 조금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세상에는 혐오가 참 많습니다.하지만 혐오가 많아질수록 이상하게 전 사랑에 더 집중하게 되더군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것이 냉소와 혐오보다는 훨씬 어려운 것이라 생각되고,그것이 우리를 그래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어서요.
사소한 이유로 순간들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하늘이 맑은 순간 떨어지는 나뭇잎의 모양새가 예뻐서,지나가다 웅덩이에 비친 참새의 모습이 귀여워서,벤치를 지나가던 강아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기꺼이 좌석을 양보하는 사람이 사랑스러워서,학생들이 조잘거리며 어울려다니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그런 순간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날 위해 무언가를 사들고 오는 마음이 사랑스러워서,잠에 들지 못하는 날 기꺼이 옆을 내주고 토닥여주는 것이,힘들다 도와달라 하면 망설임없이 손을 내밀어주는 마음이,그저 들어주며 다독여주는 다정함이 사랑스러우니 상대방도 나의 애정을 사랑하기를 바라봅니다.나의 애정을 사랑한다면 그것도 곧 조건없는 사랑일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