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는 여느 아침처럼 바쁘게 출근 중이었다. 마침 인파로 북적거리는 지하철역에서 환승 중이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김 과장, 지금 바로 보내줘요.’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부터 상사인 강정훈 팀장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바로 뭘 보내달라는 걸까? 강정훈 팀장은 종종 주어나 목적어를 생략하고 지시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네 팀장님, 어떤 것 말씀이실까요? 10분 내에 사무실에 도착하는 중이니 가자마자 찾아보겠습니다.’
‘네.’
역시 강정훈 팀장은 무엇을 찾고자 한다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버렸다.
이렇게 또 연우의 하루가 시작된다. 강정훈 팀장은 작년 이맘때 조직개편을 통해 연우가 속한 부서의 팀장이 되었다. 강정훈 팀장은 일 중독자다. 주말에도 거의 항상 출근을 했으며 휴가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문제는 본인이 이런 상태이다 보니 팀원들에게도 수시로 휴일이던 퇴근 후 저녁 시간이던 아무 때나 연락을 해댔다. 급한 사안이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건만 급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습관적으로 마치 같은 사무실 공간에 앉아 있을 때처럼, 이를테면 앞뒤 맥락도 없이 토요일 오후에 ‘이것 좀 당장 보내줘요’와 같은 문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출근을 해서 강정훈 팀장과의 스무고개 같은 대화를 몇 번이나 주고받은 뒤 겨우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서 보내주었다. 개떡 같이 말하는 상사의 문제인 걸까, 찰떡 같이 알아듣지 못하는 부하직원의 잘못인 걸까?
강정훈 팀장은 일중독이라는 사실만 문제가 아니었다. 계획형 인간인 연우에게 특히나 더 괴롭게 느껴지는 건 그가 선택과 집중이 안 되는 ADHD형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아 여러 가지 일들을 벌리지만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매우 힘든 사람이었다. 부하직원으로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는 상사와 일하는 것은 큰 고역이다.
예를 들어 어제는 A라는 업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지시를 내리지만 내일은 B가 제일 중요한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 A와 B를 보고하러 가면 그것들에는 큰 관심이 없고 C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며칠 후에 C의 경과보고를 하면 다시 A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그 후엔 D라는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전에 제일 중요한 일인 것처럼 지시했던 B라는 업무가 그의 레이더망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다. 도무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부하직원이 우선순위를 나름대로 정해서 의논해 온다 하더라도 기존 프로젝트들에는 흥미가 떨어진 것인지 또 다른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또는 본인이 지난 시간에 정한 우선순위를 기억하지 못한다. (혹은 그 새 마음이 바뀌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했다’고 경과보고를 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고 발뺌을 하고 심지어 지난 회의록을 보여줘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데 도가 텄다.
출근하자마자 연우를 찾는 건 강정훈 팀장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상사이자, 가십의 여왕 태서린 차장이 연우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상황이었다. 태서린 차장은 또 다른 피곤한 인물이었다. 40대 초반의 태서린 차장 역시 싱글여성으로 극도로 예민한 스타일이며 남의 이야기하는 게 취미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직원들에 대해 험담을 즐겨하는 모두 까기의 달인이었고 연우에게도 동참하기를 강요하는 스타일이었다. 조직 내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손 하나에 꼽을 정도로 몇 명 정도 있는 수준이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싫다는 건 자신을 좀 돌아볼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태서린 차장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아마 연우가 자리에 없을 때는 연우에 대해 험담했을 것이다.
‘저기 있잖아 연우 과장, 재무팀 박대리 말투가 너무 이상하지 않아? 인사팀 정팀장님 솔직히 옷 입는 게 너무 촌스러워. 총무팀 은과장은 인사성이 부족하고 진짜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야’
‘연우 과장, 지금 저쪽 자리에서 손톱 깎는 소리 들었어? 누군가 선풍기도 튼 것 같지 않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들려? 나 미칠 것 같아. 저 사람은 왜 사무실에서 저러는 거야?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잖아.’
‘나 저번에 만난다고 했던 그 남자 있잖아. 진짜 매너 없었어. 커피 마신 담에 저녁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1시간 남짓 만났나? 쌩 가버리는 거 있지.’
태서린 차장은 일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궁금하지도 않은 어젯밤 소개팅 어플에서 만난 남자와의 이야기, 마음에 안 드는 올케에 대한 불만, 윗집이 만들어내는 층간 소음에 대한 불평 같은 것들을 한번 시작하면 1시간 이상 연속으로 혼자 떠들고 있으니 연우의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어떤 때는 태서린 차장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현타가 오기도 했다.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싶은데 건성으로 대답하면 연우에 대한 불만이 인사고과에 반영되기도 했다. 인사고과라는 것이 늘 객관적인 기준으로만 평가되지는 않으며 상사의 주관적 의견과 입김 또한 상당히 작용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알고 있으리라.
태서린 차장에게 한참 시달린 후에 다시 업무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외근을 나간 강정훈 팀장이 다시 다그치듯 문자를 보내왔다.
‘연우 과장, 저번에 B사와의 협업 계약은 대체 언제 맺을 거예요?’
‘계약 조건에 대해서 괜찮으신지 검토하시도록 팀장님께 계약서 이메일로 엊그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해 주시면 B사에 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 계약서 다시 이메일로 보내줘요. 연우 과장이 보냈다는 이메일을 찾을 수가 없네’
연우는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강정훈 팀장에게 엊그제 보냈던 이메일을 찾아 다시 보냈다. 벌써 4번째 강정훈 팀장에게 같은 이메일을 다시 보내주었다. 그는 자기 이메일 관리도 힘든 사람이었다. 보고를 해도 기억을 못 하고, 부하직원이 자신에게 보낸 자료도 찾지 못해 항상 몇 번이고 다시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정리가 안되었다.
이렇게 산만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일들을 상당수 해내고 윗자리로 올라가는 수완을 가지고 있었으니 단순 ADHD를 넘어선 지능형 ADHD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산만하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한 면에서는 갑자기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런 유형의 특징은 부하직원을 뽑을 때 순종적이고 책임감 강한 성향의 사람들을 뽑는 경향이 있다. 상사가 벌려놓은 일을 어떻게던 힘들어도 책임감 때문에 군소리 없이 완수해 내는 부하직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옳고 그름이라던가 합리적인 판단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으며, 자기 주관이나 생각이 뚜렷한 사람은 이곳에 맞지 않다. 적절한 설명도 없이 수시로 바뀌는 상사의 변덕스러움에 맞춰 끊임없이 희생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대신 지능형 ADHD 인간은 자신의 상사에게 잘 보이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던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런데 종종 그 일이 본인이 생각해도 엄한 일이면 일단 부하직원을 불러서 그 일을 맡기고 결과물이 나오면 자신이 한 것으로 상사에게 보고를 한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지능형 ADHD 인간은 윗사람이 보기에 여러 가지 일들을 잘 해내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신임받게 되어 있고 승승장구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런 환경에서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며 원활한 협업에 힘쓰면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식의 생각이 순진하다 못해, 아직 세상을 모르는 무지함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연우는 생각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시스템의 진실을 몰랐던 건, 그리고 그걸 알았더라도 그 ‘진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건 자신의 무지함 때문일까? 세상이 잘못된 것일까, 자신이 잘못된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이곳이 연우가 매일 마주하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