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하나의 작은 사회나 마찬가지이다. 일이 적성에 맞느냐의 문제는 극단적으로 안 맞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노력하면 맞출 수 있다. 연우가 취준생이던 시절 간과했던 부분은 직장이라는 곳이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여기에서 어떻게 어우러지며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일이 적성에 맞느냐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아, 물론, 취준생 시절의 연우에게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의 돈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할 일자리라면 일단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장 간절했기에 그 외의 것들은 누가 말을 해준들 부차적인 문제였겠지만 말이다.
회사 짬밥 먹은 지 10년이 넘어가다 보니 다양한 형태로 회사 생활을 하는 동료, 선후배들을 보게 되었다. 특히 지위에 따라 타인에 태도를 완전히 달리하는 간신배형, 회사 선배들의 정치적인 모습에 실망하지만 회사가 주는 사회적 타이틀과 경제적 안정감을 포기할 수 없어 체념하고 현실과 타협 중인 현실순응형,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더라도 이제는 회사에서 월급 타 가는 것 외에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이는 월급루팡형의 인간들이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연우의 부서에도 이런 유형들이 몇 있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이현주 대리는 정말이지 간신배형 인간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힘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기를 꺼려하지 않으나 자신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가 본인보다 낮은 직급에 있는 사람을 큰 소리로 다그칠 때면 옆자리에 앉아있는 연우가 듣기에도 무안할 정도였다. 그 정도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면 회의실에 불러서 따로 얘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모두가 있는 앞에서 그렇게 사람을 몰아가야 했는지? 심지어 그녀가 야단치는 후배가 그렇게 지대한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대신 본인의 안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강정훈 팀장이나 태서린 차장 앞에서는 살살 눈웃음치며 비위를 맞춰주고 세상 그렇게 상냥할 수가 없었다. 특히 강정훈 팀장이 원한다면 설사 특정 인물을 괴롭히는 계략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동참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또한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술을 좋아하는 강정훈 팀장을 위해 수시로 후배들을 끌어모아 회식 자리를 마련해 바쳤다. 그러나 강정훈 팀장이 옆에 없으면 자신은 그런 일에 동참한 적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철저하게 연기할 수 있었으며, 권력의 추가 다른 곳으로 향하면 그쪽에 가서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기력으로 치면 거의 아카데미 주연상 급이랄까.
연우는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원래부터 저런 성정의 사람이었던 건지, 아니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조직에서의 정치적 상황에 많이 노출되고 어떤 유형의 사람이 윗사람에게 총애를 받고 승진하는지를 많이 보아서 저렇게 된 것인지 궁금해지곤 했다.
같은 부서의 또 다른 인물인 김윤철 과장은 현실순응형 인간의 전형적 예였다. 김윤철 과장은 태서린 차장과 동갑내기로 입사도 태서린 차장보다 빨랐지만 어쩐 일인지 작년 승진심사에 통과하지 못해 여전히 과장직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대학 캠퍼스 커플이었던 아내와 결혼했고 그들 사이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4살짜리 딸이 있었다. 그도 한때는 패기 넘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특히나 아이를 낳고부터는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회사에 붙어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낳고 보니 그 아이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한 다 해주고 싶은 것이 아빠 마음이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대책 없이 그만두었을 때 회사 안은 전쟁터, 회사 밖은 지옥임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별다른 재주도 없으니 회사에서 독립해 혼자만의 일을 할 엄두는 나지 않고 이만한 회사로 이직할 자신도 없다. 따라서 딸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버텨야 했다.
김윤철 과장은 회사에서 벌어지는 불합리적인 일들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거기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후배가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도 나서서 감싸는 일은 없었으며 자기 자신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바뀔 일이 아닌 것 같으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회사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중이 절이 싫다면 중이 떠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윤철 과장은 사내 정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거나 야비하게 살지는 않았다. 특정 권력자들에게 아첨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그들이 시키는 일들이 말이 되던, 안되던 묵묵히 할 뿐이었다. 그게 옳아서라기보다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았으면,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체념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연우 입장에서는 이현주 대리보다 김윤철 과장과 같이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현실순응형 인간이 함께 일하기에는 나은 동료였다. 간신배형인 이현주 대리만큼이나 연우를 짜증 나게 만드는 유형의 인간들이 있으니 이들은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월급루팡형 인간들이다.
IT팀 소속인 박광수 대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업무를 최대한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담당 업무는 사내 전산망 및 계정 관리, 임직원 PC 및 모니터 구매 등 IT 관련 자산 관리 등이었는데, 그와의 대화는 보통 이랬다.
“대리님 안녕하세요?”
“……네에..?”
업무상 요청할 것이 전화를 걸면 그는 항상 귀찮다는 듯 떨떠름한 목소리로 받는다.
“네 대리님, 다름이 아니라 사장님께서 갑자기 화상 회의를 하신다는데요, 저번에 새로 구매해 주신 TV 모니터 사전 테스트를 해보는데 연결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혹시 잠시 와서 봐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곧 퇴근하려고 하는데요..”
“아 네.. 그럼 혹시 부서에 다른 도와주실 분이 계실까요..? 저도 퇴근 임박해서 연락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급작스럽게 잡힌 회의라서요…”
“갈 사람이 없는데요.”
아무리 공손하게 부탁을 하고 읍소를 해도 박광수 대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한참 하다가 그는 결국 오지 않았고, 회의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애쓰는 연우를 본 지나가던 다른 팀 직원이 와서 도와주어서 겨우 기기를 세팅하는 데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보고 받는 일이나 참석하는 회의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최대한 신경 쓰는 일이기 마련인데 그는 무슨 배짱인지 아무 액션을 취하고 싶지 않아 했다. 어차피 회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혼나는 건 그 자리에 있는 연우이지, 본인이 아니기 때문인 걸까.
그 특정 일화가 아니더라도 그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그랬다. 직원들이 무엇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고 하면 보통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혹은 ‘저도 잘 안 되는데요’가 끝이었다. 아니, 자신이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보겠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더 잘 아는 누군가와 연결을 시켜주던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적어도 회사에서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와 역할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고 믿는 연우로서는 기본도 지키지 않는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업무태도로 인해 연우뿐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불편을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카톡 친구목록을 보고 있는데 박광수 대리와 전에 카톡으로 연락한 적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의 프로필 사진이 연우의 눈에 띄었다. 사진 속 그는 결혼을 앞두고 찍은 사진인지 턱시도를 입고 평소의 그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뚱한 표정과 달리 활짝 웃고 있는 새신랑의 모습이었다. 연우가 평소 보던 박광수 대리의 모습이 아니라서 낯설기만 했다.
가끔 회사에서 보면 최소한의 역할만 하는 월급루팡 내지는 윗선에 붙어서 정치로만 살아남으려고 하는, 정말이지 연우로서는 닮고 싶지 않은 매너리즘에 빠진 자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들이 카톡친구로 연결이 되어 프로필 사진 속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을 때가 있다. 그들은 최소한 카톡 사진 속에서는 자상한 아빠, 남편, 가장.. 뭐 이런 모습들이다. 아내와 이마를 맞대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찍은 사진, 부부가 아이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사진 등등 도무지 회사에서 봤던 철밥통 냉혈한 내지는 게으름과 매너리즘으로 점철된 때 묻은 아재의 모습과는 영 다르다. 이토록 생경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나마 가정에서라도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자신이 속한 모든 곳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에 따르는 책임을 지고 대단히 정의로운 자는 못될지 언정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은 있어 최소한 그릇된 곳에 붙어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사는 자는 되지 말자는 연우의 생각은 고리타분하고 요령 없는 생각일 뿐인 건지. 살면 살수록, 그것이 기본이 아닌 세상인 듯싶었다. 그렇다고 박광수 대리가 모든 면에서 나쁜 사람인가? 카톡 프로필 사진 속 박광수 대리는 연우가 알고 있는 박광수 대리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전적으로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는 것인가 싶었다. 그 말인즉슨 연우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좋은 사람’도 회사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은 역시 다면적인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