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 (時節因緣)

by 구키

모든 직장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주말이 되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약속이 있는 토요일이었다. SNS에 뜨는 핫플레이스들도 검토해 보았으나 날이 너무 추워져서 요즘 같은 때 벌벌 떨며 밖에서 웨이팅을 해야 하는 식당들 보다는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 같은 실내가 낫겠다는 것이 동기들의 중론이었다. 시내 주요 백화점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서로 경쟁하듯 화려한 데코레이션을 선보이고 있었다. 불경기 라고 하지만 백화점에 가면 사람들로 북적였다. 연우는 이 날 백화점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주에 있을 소개팅에 입고 나갈만한 옷이 있을지 둘러보기로 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주연, 현정, 수현, 그리고 연우는 고등학교 시절 짝꿍이거나 앞뒤에 앉았던 친구들 사이로 그 시절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추억이 많은 사이였다. 오랜만에 해외에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수현이 한국에 잠시 들어온다고 해서 결성된 것인데 정작 이 모임의 원동력이 된 수현은 일이 생겨 나오지 못했다. 백화점 식당가에 도착하니 딤섬 레스토랑에 먼저 와 앉아있는 주연과 현정이 손을 흔들었다. 주연은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했다. 꽤 부유한 사업가 집안 출신인 주연은 소개팅으로 만난 정형외과 의사와 결혼해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고 현정은 대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남자와 결혼해 초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으며 IT 기업에서 일하는 워킹맘이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는 연우가 대치동에서 핫한 아이들 학원이 어딘지 알게 된 것도 주연과 현정을 통해서였다. 요즘 아들 교육 때문에 현정은 고민이 많았다. 회사 일만 생각하기도 바쁜데 학군지로 무리를 해서라도 이사를 가야 하는 것인지, 선행학습은 얼마나 시켜야 하는지, 맞벌이지만 앞으로 늘어날 교육비, 집의 대출 원금과 이자, 노후 대비는 동시에 가능할 것인지, 그동안은 종종 친정 엄마의 도움으로 육아를 해왔는데 최근 몸이 안 좋아지신 관계로 생긴 공백은 어떻게 할지 등 고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주연이 부러울 때가 있다고 연우에게 조용히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연은 남편이 의사인 점도 있지만 친정에서 증여해 준 부동산에서 매달 월세가 꽤 나오고 있어 여유가 있다 보니 아이들 영어유치원이라던가 학원 비용 정도는 무리 없이 지원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대놓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집안에 여유가 있어 물려줄 것이 많을 것으로 짐작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아이들 공부에 대해 크게 안달복달하지 않았다. 반면 현정은 주변에서 아이 교육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나만의 중심을 잡자고 다짐했건만, 요즘 입시는 일찍부터 전략적으로 준비해야 하고 엄마의 정보력이 중요하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워킹맘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남편이나 현정이나 좋은 대학을 나와 회사에서 꽤 괜찮은 연봉을 받고는 있었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아이에게도 미래에 크게 물려줄 만한 유산을 남길 것 같지가 않았다. 주연처럼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해 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면 아이의 공부만큼은 최대한 지원해 주고 어느 정도 수준의 삶을 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다들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냈어?”

“그냥 정신없지. 요즘 우리 주원이 미국으로 유학 보내야 하나 고민 중인데 알아볼 것도 많고 매일 하루에 몇 번씩 애 학원 라이드 하느라 바쁘다. 친구들 모임은 나도 오랜만이네.”

“나도 회사 다니고 애 케어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요즘 남편도 나도 회사가 너무 바빠서 힘들어 죽겠어. 그나저나 너 이전에 주원이 보냈다는 영어 학원 어때? ”

주연과 현정이 아이가 있다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그런지 그날의 주제는 주로 아이들 교육 이야기로 흘러갔다. 어쩌다 현정과 연우가 단둘이 만나는 날에는 그래도 회사 이야기를 좀 더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이 엄마 둘이 모인 데다 현정이 아이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대화에 낄 수 없는 연우는 중간중간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아이를 낳는 것도 멋모를 때 하는 게 낫다는 말이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과연 내가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정은 엄마가 되고나서부터는 커리어에 대해서 큰 욕심을 버렸다고 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지금은 적당히 일하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적당한 워라밸 있는 포지션을 원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적당히’ 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 힘들어하고 있었다. 현정처럼 적당히 일하기를 원하는 친구도 있는 반면, 오늘 모임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또 다른 친구인 수현은 아이가 있어도 커리어 욕심은 그대로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수현은 친구들과 만나면 아이 이야기도 하지만 본인 커리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모두 자신의 아이는 사랑하겠지만 본인의 성향에 따라 아이에게 모든 포커스가 향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아이 엄마로서의 정체성만큼이나 누구의 엄마 혹은 아내가 아닌 자신으로서의 삶이 매우 중요한 친구가 있다. 이것은 꼭 직업의 유무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또한 각자가 처한 사회, 경제적 상황에 따라 고민의 포인트가 다 달랐다. 고등학교 때는 최대고민이 입시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다양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관심사는 연우의 소개팅으로 옮겨졌다.

“그나저나 너 소개팅한다고? 어떤 사람이야?”

“무슨 사업하는 사람이라는데 만나봐야 어떤 사람인지 알지 뭐.”

“오, 나이는?”

“우리보다 3살 맞아.”

“딱 좋네-! 사진은 없어? 좋겠다. 예쁘게 입고 나가서 데이트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 부럽다, 얘.”

“부럽긴. 잘 되어야 좋은 거지.”

결혼한 친구들은 종종 연우를 부러워했다. 그 간지럽고 설레는 감정을 느껴본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너는 아직 연애의 기회가 남아있으니 얼마나 좋으니, 했지만, 연우는 그리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개팅에 나가서 실망만 하고 돌아오는 일이 거듭되니 괜히 나갔다가 씁쓸한 마음만 안고 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지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오후에 아들 학원 라이드 때문에 가야 한다는 현정이 제일 먼저 자리를 떴고 남편과 딸들이 근처에 있어 만나기로 했다는 주연과 헤어져 백화점 옷 코너를 돌았다. 모처럼 잡힌 소개팅인 만큼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어 치마를 입고 싶은데 요즘과 같은 영하권 날씨에 추위를 많이 타는 연우로서는 무리스러운 복장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바지 위에 여성스러운 스타일의 니트를 받쳐 입는 것으로 결정했다. 큰 마음먹고 보온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마음에 드는 화사한 색의 여성스러운 니트를 구매했다. 이번에는 좀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주연이 현정과 연우가 함께 있는 문자 단톡방에 오늘 식당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다.

‘그래 나도 반가웠어~. 우리 종종 보자!’

‘그래 또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가웠다. 하지만 다시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자의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의던 타의던 자주 연락하지 못했고 대학 졸업 후에 각자의 선택지가 달라지고 놓여있는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관심사도 많이 달라졌다. 오늘 모임도 실은 해외에 나가 있던 수현이 잠시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모이게 된 것이었으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끼리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셈이었다. 한때 다 같이 남자친구도 없는 싱글이던 시절에는 노후에 우리끼리 같은 아파트 옆집이나 위아랫집에 살자고 했건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해버린 주연을 필두로 하나둘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면서 화젯거리가 크게 달라졌다. 특히 주연이 처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는 나머지 친구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였고 다들 처음 취업해 돈도 벌고 시간이 날 때 함께 놀러 다녔던 시기였다 보니 주연이 소외감을 많이 느끼고 한동안 멀어졌었고, 그 후에 현정과 수현이 뒤이어 결혼을 하자 연우가 소외감을 느끼게 된 시기가 있었다. 결국엔 마음을 풀었지만 한 때는 똑같이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주연이 부러운 마음에 현정이 연락이 조금 뜸했던 적도 있었다. 그 사이에 아이 친구 엄마, 회사 동료, 그 외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인연들이 생겼고 서로가 모르는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인연들도 한때는 거의 매일 연락할 정도로 무척 가까웠으나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지거나 상황이 너무 달라지면 언젠가부터 연락이 뜸해지고 1년에 한 번 연락하기도 민망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가끔 휴대폰 안의 친구 목록을 보면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인데 특별한 용건 없이 연락하기가 참 애매했다. 그래서 연우는 요즘 ‘시절인연 (時節因緣)’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변한다. 연우 자신이 살아오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듯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쩌면 그 경험들로 인해 예전에 알던 서로가 아닐 수도 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더라도 미묘한 차이라도 어쩌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한동안 그 사실이 연우는 슬프기도 했고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주변 누구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품고 있지 않는 것 같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자연스러운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너무 슬퍼하거나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다. 설사 지금은 연락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시절의 연우와 함께해 주고 위로가 되어주었던 관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고마운 존재들이지 않은가.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믿는 편이 자신을 위해 나을 듯했다. 연우는 지나간 ‘시절인연’들에 대해 서운한 마음보다는 감사와 따뜻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고 싶었다. 때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기도 있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인연이 오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 예전의 관계들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인연이라는 것이 억지로 붙잡는다고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느슨했다가 때로는 가까이했다가를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삶의 지혜가 충만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나이를 먹으면서 죽는 날까지 새로운 경험들을 만나 깨우치고 터득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연우는 그렇게 어른 되는 연습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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