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 염리동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전에>와 <좋은 기분>
최근에 참 기분 좋은 책을 한 권 읽었다. 제목도 <좋은 기분>. 마포구 염리동에서 <녹기전에> 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박정수 대표가 쓴 책이다. 그의 일과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이 책은 얼핏 들으면 자영업자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어떤 일을 하든 누구에게나 와닿을만한 내용이 담겨있다.
책의 시작은 조금 독특하다. 이 책은 원래 박정수 대표가 함께 일할 동료를 찾기 위한 채용공고에 첨부했던 일종의 ‘접객 가이드’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단순히 손님 응대에 필요한 기술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게의 존재 이유, 일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진지하게 담고 있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무려 160페이지에 달하는 이 글은 자영업자뿐 아니라 기획자, 마케터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고, 결국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가게는 경의선 숲길에서 조금 떨어진, 눈에 띄지 않는 골목에 있는 작고 소박한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이렇게 긴 글을 채용공고에 붙였다는 사실도 놀랍고, 그 글을 읽고 가치를 알아봐 준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도 놀랍다.
책에서 와 닿았거나 인상 깊었던 점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이윤이 전부가 아닌, 자신만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
1)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아이스크림
박정수 대표는 <녹기전에>의 진짜 아이템은 아이스크림 보다 ‘시간’이라고 말한다. 어릴적부터 그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보는 것도 참 좋아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이야말로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게 해주는 물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의 기쁨, 바로 ‘녹기 전에’ 느낄 수 있는 순간의 행복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행복’을 큰 성취 뒤에 오는 미래의 이상향으로 생각하지만, 그의 말처럼 행복은 일상 속에서 찾아오는 아주 짧은 순간들의 기쁨이다. 그는 심지어 ‘아이스크림은 매개일 뿐이고, 그보다 시간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2) ‘좋은 기분’을 나누는 일
그가 생각하는 접객이란 ‘좋은 기분을 나누는 일’이다. 맛은 그저 하나의 지표일 뿐, 진짜 중요한 건 손님이 가게에서 좋은 기분을 느끼고 돌아가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좋은 기분’은 반드시 사람들과 사회로 퍼져나가며, 다시 가게로 돌아온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렇게 그는 세상과 자신이 하는 일의 연결성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즐거워야 손님에게도 좋은 기분을 전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을 위한 장치들도 마련해둔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재료로 매일 메뉴를 바꾸거나, 손님들과 함께 나무심기를 하거나, 지역 학교의 개교기념일에 맞춘 메뉴를 개발하는 등의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우선적으로 본인이 즐겁기 위한 것이고, 그 즐거움은 손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실 우리가 돈을 벌고, 물건을 사고파는 이유도 결국엔 '좋은 기분'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 그는 가게를 통해 돈 이상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채우고 있으며,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2.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시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이 이야기였다. 박정수 대표도 장사가 잘되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것조차 스트레스가 될 정도로 힘들어 1평도 안 되는 매장 화장실에 숨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어차피 누가 보든 안 보든 내 할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가게를 정리하고, 메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더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녹기전에>만의 개성과 정체성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경험은 단순히 가게 운영의 이야기를 넘어서, 인생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준다. 기다림의 시간, 혹은 과정의 시간 동안 자신만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작은 즐거움을 만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태도가 결국 자신을 구하는 힘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이런 이야기가 나중에는 가장 주목받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사람들도 보통 그런 이야기에서 가장 힘을 얻기 때문에.
우리 동네의 ‘좋은 기분’ 가게들
이 책을 읽고 나니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몇몇 가게들이 떠올랐다. 이전에 살던 곳은 회사들이 많고 번화한 지역이라 대형 프랜차이즈가 주를 이뤘다. 반면 지금은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가게들이 많다.
그중 한 곳은 자연주의 식당이다. 제철 나물 비빔밥, 육개장, 제육볶음 정도의 소박한 메뉴지만, 조미료 없이 정성스럽게 만든 반찬, 진심이 느껴지는 주인의 미소가 음식 이상으로 만족을 준다. 플라스틱 포장 최소화를 위해 보증금을 받기도 하는데, 이 또한 철학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친절은 억지로 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느껴진다.
또 한 곳은 동네 마트 옆의 작은 카페. 주인 아저씨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인테리어와 만화책, 90년대 음악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직접 만든 애니메이션 캐릭터 십자수, 세계 각국의 지폐들,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까지—작지만 애정이 가득한 공간이다.
마지막은 젊은 커플이 운영하는 2층의 감각적인 카페. 매일 바뀌는 신선한 재료의 샌드위치, 지역 브랜드와의 협업, 손님들이 남기고 간 쪽지들까지. 이곳은 단지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장소다.
이런 가게들은 하나같이 주인의 취향과 철학이 공간에 묻어나 있다. 손님도 그 고유함을 알아볼테니, 지금 당장 문전성시를 이루고 유명하지 않더라도, 이 가게들이 오랫동안 자기 모습으로 있어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성공과 기회의 관계
이제 <녹기전에>는 하나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평일 오후에도 사람들로 붐비고, 관련 기사도 쏟아진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다. 다른 동네에도 이처럼 따뜻하고 정성 어린 가게들이 많을 텐데, 왜 어떤 가게는 주목받고 어떤 가게는 그렇지 못한 걸까?
물론 <녹기전에>는 손님과의 소통, 재치 있는 이벤트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박정수 대표의 철학과 태도가 진심이라는 점에서 빛이 난다. 거기에다 그의 진심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을 ‘운’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어떤 플랫폼에서 누가 그 글을 발견해주었고, 그것이 더 많은 기회를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접객 가이드를 쓸 수 있는 철학이 없었다면, 그 이후의 모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진심’만으로는 주목받기 어렵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유명하지는 않지만 진심을 다해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을 응원하게 된다.
자기다움은 성공 전략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조건이다.
최근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소개한 책 <페이머스: 왜 그들만 유명할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공의 충분조건은 ‘운’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훌륭함은 기본이고, 그 위에 ‘행운’이 더해져야 명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맥이 빠지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결국 우리가 쏟아야 할 노력은 성공이 아니라, 행복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
성공은 외부의 요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행복은 그렇지 않다. 행복은 내 태도와 관점,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상태다. 그 사실은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녹기전에>의 철학은 ‘어떻게 성공했는가’보다 ‘어떻게 자기답게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메뉴를 매일 바꾸고, 손님과 시간의 가치를 나누며, ‘좋은 기분’을 전하려 했던 그의 태도. 그것이 우연한 기회를 만나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다.
우리는 자꾸만 ‘성공해야 행복하다’고 믿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자기답게 살며 오늘의 기분을 지켜가는 삶 —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행복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