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나는 매일 밤 일곱 시면 저녁도 마다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방송 프로듀서나 카메라맨도 나와 같은 일종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 군인에 가까웠다. 밤늦도록 일하고도 새벽이면 벌떡 일어나 카메라와 삼각대를 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그리젠토의 신전 위로 떠오르는 해를 찍고 그 위로 흘러가는 구름 떼를 찍었다.’
- 김영하 산문집 <오래 준비해온 대답> 중
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읽다가 방송 피디를 군인에 비유한 부분에서 무릎을 쳤다. 방송 피디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군인 정신‘이라고 하고 싶다. 방송 제작 환경은 간난고초의 야외 촬영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쾌적한 실내에서 하는 스튜디오 프로그램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피디든지 촬영장과 편집실에서 총탄 없는 전쟁을 치르는 건 마찬가지고, 방송 제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지만 예술적인 광기나 감수성보다 어떻게든 방송 분량을 만들어내겠다는 집요함과 방송 날짜까지 반드시 편집을 마치겠다는 투철한 책임감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되게 만들겠다는 정신‘. 이런 군인정신이 없다면 우리나라 TV엔 화면조정 시간에나 볼 수 있는 컬러바가 흐르는 곳이 많았을 것이다. 그만큼 제작 기간은 짧고 제작 환경은 열악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막내 작가 시절 만났던 여자 피디는 방송 작가 출신이었다. 작가를 하다가 피디로 전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작은 체구의 여자 피디는 대부분의 피디가 그렇듯 꾸밈(?)이 없고 수수한 차림새였다. 야외 촬영으로 햇빛에 그을린 피부는 까칠해 보여도 눈은 반짝반짝했는데, 가끔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임신해서 배가 부른 채로 촬영을 하다가 눈밭에서 굴렀던 사연을 실실 웃으며 얘기하던 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린 막내 작가들을 앉혀놓고 풀어놓는 무용담이니 피디의 마음대로 부풀려지게 마련이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 피디는 정말 일이 재밌나 보구나. 그리고 임산부라는 개인적인 특수상황보다 직업인으로서 피디의 책임감이 더 선행한다는 것을.
몇 년 후 만난 또 다른 피디는 촬영하고 돌아오다 논두렁에 차가 처박히는 사고가 났는데도 사무실에 돌아와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조용히 편집을 시작했다. 병원에 가지 않은 이유는 피가 철철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웃었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을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제작하는 특집이나 다큐멘터리는 좀 여유가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말의 콩떡이다. 대부분 해외 촬영이 들어가기 때문에 해외 일정을 맞추기 위해 구성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일단 해외 촬영부터 떠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제작 기간이 길다면 긴 다큐멘터리도 이 정도인데 매주 한 편씩 제작하는 아침, 저녁 생방송은 그야말로 죽음의 조. 아이템이 엎어지든, 섭외해놨던 촬영이 엎어지든 한 군데서 삐끗하면 그 주는 지옥문이 열린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템 선정, 섭외, 촬영, 편집, 원고까지 모두 끝내야 하므로, 사고가 터져 수습하는데 하루를 날린다면 편집과 대본 작업의 시간은 더욱 줄어들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전국을 순회하듯 지방 몇 군데를 1박 2일 동안 운전까지 하며 촬영을 다녀오면 편집이 기다리고 있다. 말 그대로 강철 체력이 아니라면 버틸 수 없는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방송 작가는 어떨까? 피디와 함께 현장에 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전화기를 무기로 전쟁을 치른다. 온갖 자료를 찾고, 섭외 리스트를 작성한 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섭외, 취재 전화를 돌린다. 그렇게 해서 섭외만 잘 되면 큰 산 하나는 넘은 셈이다. 하지만 섭외는 시간 안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촬영 직전, 사례자가 촬영을 취소하는 경우도 많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부끄러워서, 집을 공개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가족이 아파서... 이유도 다양하다. 그러면 섭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예전 아침 방송을 하던 서브 작가 시절. 후배 막내 작가는 오십견이 있는 사례자를 찾아야 했는데, 섭외가 됐다가 취소되길 여러 번. 당장 방송까지 이틀밖에 안 남은 급박한 상황이었다. 피디는 언제 촬영가냐고 독촉하고, 선배 작가들은 어떻게 돼가냐고 자꾸 물어내니 막내 작가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다.
“도저히 못하겠어요. 사례자가 안 구해져요.”
당시만 해도 막내 작가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는 건 차라리 나를 잘라달라는 뜻이다. 눈물로 호소하는 막내의 절규에도 우린 침착하게 말했다.
“방송에 컬러바 나가는 일은 없어. 섭외할 병원 리스트 더 찾아서 작성하고 오늘 밤까지 전화 돌려보자. 같이 찾아줄게.”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있었다. 그 이유는 몰랐는데, 나는 방송 일을 하면서 그 이유를 스스로 깨우쳤다. 인디언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을 거라고. 방송 작가는 섭외가 될 때까지 전화를 돌리기 때문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 같은 인정사정없는 구호처럼. 다만 우린 구호는 외치지 않는다. 조용히 노트북을 켜고 전화기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