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이 안 되는 일에는 매달리기로

by 전두엽

아버지는 항상 운명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도시를 학살하고도 끝내 사과 없이 떠난 독재자나, 영문도 모르고 한 순간에 바다로 잠긴 수백명의 학생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신은 없는 게 아닌가' 원망 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영역이 있다'고 믿으면 조금은 괜찮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마다 저항 없이 괴로워 하는 딸에게 효과적인 방어기제를 가르쳐 주신 것이죠.

아버지는 이번에도 제가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역사는 항상 반복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학생이던 당신이 거리에나가 6.29 선언을 어렵사리 얻어내고 승리감에 취했던 것도 찰나, 직후 직선제에서 군부 세력이 또 당선됐을 때 절망했었다고.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역사는 후퇴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다고.

이렇듯 무력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걸 두고 아버지는 '초월'이라고 표현하셨어요. 누가 나라 대표로 뽑히더라도 절망에 심취하지 말고 '초월'해 버리라는 것이었지요. 이미 운명론을 방어기제로 잘 써먹으며 살아온 터라 이번에도 그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나와 내 고양이가 건강하고,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전세금을 날리지 않는 상태로 5년만 버티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무렵 만나던 애인은 초월을 정말로 잘 해낸 것만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름의 소신이 있었지만 그걸 붙잡고 괴로워 하거나 생각의 끝이 자책으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당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하고 싶은 일과 갖고 싶은 것에 닿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옆에 있으니 당연히 건강해지더라고요. 고민할 것도 없고 머리 아픈 것들은 신경 꺼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이쯤 되니 그동안 왜 그렇게 괴롭게 살았나 하고 과거의 제가 의문스럽기까지 했어요. 나 혼자 아등바등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자책한다고 해서 저 비극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남 일은 남 일일 뿐,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이렇게 만사에 명쾌함을 주는 걸요.

애인은 초보 고양이 집사였습니다. 우연히 집 앞에 찾아온 길고양이에게 추위와 배고픔을 피할 거처를 마련해 준 게 시작이었어요. 물 흐르듯 자신의 집 안으로 고양이를 데려와 함께 누워 잤습니다. 문제는 그 고양이가 새벽마다 수없이 애인을 깨워대느라 통잠을 못 잤다는 것이죠. 풀풀 날리는 털을 룸메이트가 탐탁치 않게 여긴 것도 문제를 더했습니다.

그러더니 몇 주 지나지 않아 고양이가 현관을 보고 서글프게 울었다는 군요. 그게 혹시 길에서 자유로웠던 이전의 일상을 그리워하는 행동인가 싶어서 현관을 열어줘 봤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 밖으로 나가더니 사라졌다는 것 아니겠어요.

순식간에 손발이 차갑게 식고 그 고양이의 안부가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고양이를 배려한 일이었다고 순진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하는 애인에 대고 '유기'라는 잔인한 단어를 들먹이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뭐라고 항변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 길로 이별을 고했습니다. 적잖이 억울했을 테죠. 하지만 제겐 그게 고양이를 배려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기가 싫었습니다.

허무한 일이 지나고 그렇게까지 화가 치밀었던 이유에 대해 곱씹어 봤습니다. 애인은 어쩌면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한 셈이었습니다. 고양이가 들어오고 싶어하는 눈치이니 집 안으로 들였고,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이니 문을 열어준 것이었지요. 그 행동이 가져올 가능성에 대해선 자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어쨌든 배려하려는 의도였으니 괜찮아'와 '사람 손을 타버렸으니 더 위험해질 거야'라는 태도의 경계를 가르는 건 아마도 그 고양이가 맞을 시련을 얼마나 더 처절하게(과하게) 걱정하느냐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 처절하게 걱정한 쪽은 저였을 테죠.

작심한 듯 이별을 고하는 저에게 애인은 "둥글둥글하게 지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 말은 곧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초월'의 태도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러게요. 왜 저는 마치 제게 처한 일인 듯 화를 참을 수 없었을까요. 아무래도 제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어서, 라고 처음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알았습니다. 저는 그 '초월'한 이들의 쉬운 행동 하나로 인해 한 미물의 삶이 송두리째 달라지는 광경을 수도 없이 봐 왔다는 것을요. 어쨌든 세상이 망할 일은 없다며 한 순간 쉽게 현관문을 열어 버리는 이들로 인해 결국 누군가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일이 끝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정하는 일조차 누군가의 투표로 인해 인정 받기도, 부정 당하기도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도저히 '초월'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밀물과 썰물의 반복 끝에 결국 발전이 있다고 해도 그 숱한 파도로 인해 살이 쓸리고 익사하는 이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그 과정을 '어차피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니니까' 하고 둥글둥글하게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보다 결국 나은 세상을 맞이할 것이라는 희망은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과정에서 벌어질 희생을 모두 감수하고 싶진 않습니다. 1g이라도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줄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살리는 게 맞다고요.

처음부터 다시 사투를 위한 채비를 해야 합니다. 지난할 여정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초월'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초월'이 안 되는 일이라면 차라리 매달려야겠지요. 악착같이 버텨야겠습니다. 그간 냉소하며 체념한 척 굴었던 모두에게, 또 과거의 저에게 다시 한 번 작별을 고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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