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꽃이 피는 길 위에서"
터널 끝에 맺힌 평온의 향기
"어머니,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자식한테 먼저 전화하지 말고 꼭 119부터 누르세요!"
어머니가 떠나신 지 어느덧 3년. 눈이 소복이 내리던 날, 고향 집에서 닷새를 머무시다 그분은 소천하셨다. 그때의 다급했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선한데, 이제 나는 대상을 바꿔 같은 말을 내뱉는다.
"여보,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바로 119 눌러요."
남편이 투병생활 끝내고 한 달 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 퇴원은 일주일 전에 했지만 숨 가쁜 순간들이 많았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나날들. 걱정 또한 삶의 일부라지만 지나친 것은 결국 집착일 뿐이다.
힘들었던 순간들은 "잠시 내려두고" 오랜만에 늘 다녀왔던 길을 걷기로 했다. 밖의 기온은 영상 5도였지만 바람 끝은 차가 웠다.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거리는 그다지 붐비지 않는다.
행복은 산너머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었다. 내가 먼저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에 의해 전해져 내려온 진리였다.
"무슨 일 있으면 저 말고 119 눌러요."
이 서늘하고도 다급한 말속에서 나는 역설적인 행복을 발견한다. 어쨌든 당신이 살아서 내 곁에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제 완치되었습니다. 약도 드실 필요 없어요."
의사 선생님의 그 한마디,
오늘따라 하늘은 더욱 높고 더 푸르렀다. 허공을 바라보며 맘껏 소리 질렀다. 나는 행복하다고, 정말 행복하다고.
늘 오가던 일산지 해변으로 향했다. 밀려오는 잔잔하게 노을 진 파도는, 오늘따라 님을 반겨주는 듯 멀리 지평선 끝까지 은빛으로 반짝인다. 우리가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도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더 이상 고뇌의 늪으로 빠져 버리지 않을 것이며, 이 평온함 속에 머물 것이다.
"해변 산책로엔 아직 찬바람이 돌아 썰렁한 기운이 남았지만, 매번 오가던 이 길만은 변함이 없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도 예전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이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았다."
노송 가지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비쳐 왔다. 봄은 저만치 겨울의 끝자락에 있건만 등 뒤로 쏟아지는 온기 속엔 이미 봄이 한 움큼 섞여 있었다."
사철나무는 푸른 기운을 머금은 채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등대 곁의 노송들은 따사로운 햇볕 아래 은빛을 머금는 듯 찬란히 빛나고 있다.
저 푸른 하늘 끝까지 곧게 솟아오르는 나무들처럼,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희망도 다시 거침없이 가지를 뻗어 올리는 듯했다. 이제는 " 눈부신 햇살이 비칠 날들만 가득할 것이 예감된다.
누군가 잠시 쉬었다간 이 자리! 주인공이 비어 있어 다소 을씨년스럽지만, 오늘따라 노송(老松)들과 어우러진 빈 의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깊은 멋을 자아낸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모든 조각들이 이토록 행복해 보일 수 있을까? 문득 자신에게 물어본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난해 차마 다 피지 못한 채 사그라들지 않았던 늦깎이 갈대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한들거린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어도 이토록 질긴 생명력과 인내를 불어넣은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삶 또한 이 갈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찬란했던 지난가을, 저 숲 속에서 제 순서를 기다리며 묵묵히 견뎌온 갈대처럼 가슴 깊게 뿌리내려 있을 테니까.
뒤늦게 피어난 갈대들은 여전히 제 몫의 삶을 다하려는 듯, 지치지 않고 하늘거리고 있다."
. 출렁다리! 마음이 허전할 때 발길이 닿던 곳이다. 푸른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내 안의 상처들을 묵묵히 보듬어 주는 이곳.
발아래 바다는 하늘과 맞닿은 채 잔잔히 일렁였다. 그 빛깔은 푸르다 못해 깊은 녹색의 생명력을 뿜어냈고, 청량한 기운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차갑고도 따스하게 스며들어왔다.
가슴속 깊이 고여있던 고뇌와 슬픈 기억들을 저 창공 위로 던져버렸다. 한숨과 눈물, 끝내 비우지 못한 욕망까지도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아래 나의 소란스러웠던 어제들이 형체 없이 흩어져버린 듯 고요함이 밀려 내린다.
사월이면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칠월에는 보랏빛 수국이 흐드러졌다.
팔월, 맥문동꽃이 푸른 숲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면, 구월에는 꽃무릇이 붉게 타올라 나그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곳, 겨울 언저리마다, 붉은 동백으로 채우던 그 아름다운 등대..
9월의 끝자락 소나무 숲 아래 붉은 잉크로 물들인 듯한 꽃무릇이 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한다. 붉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뜨겁게 물들여지는 꽃무릇 동산에서, 다시 함께 머무를 그날을 꿈꾼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처럼, 우리의 삶도 이 꽃무릇처럼 찬란하게 피어나기를.
사시사철 추억이 숨어 있는 아름다운 곳 4월이면 하얀 벚꽃은 눈처럼 흩날려 소복한 길을 내어 주었고, 춘백의 붉은 입술이 땅 위에 뚝, 떨어질 때 우린 그 길을 청춘이라고 불렀다.
나무의 나이테가 굵어지는 동안 우리의 사랑도, 때론고단했던 꿈조차도 이 오솔길은 묵묵히 그늘이 되어 주었다.
밤이면 보랏빛은 눈부시게 피어나 어둠을 밝히고..
청춘은 지나갔어도 그리움은 보랏빛으로 남아, 늦은 밤에도 환히 빛을 밝혀주는 이 꽃을 누가 맥문동이라고 했을까?
인내로 빚고 겸손으로 채워낸 보랏빛 청춘. 그 고귀한 흔적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선연히 빛나고 있다.
작은 꽃잎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어 여름이 오기저 수국잔치 열렸네작은 꽃잎들이 서로의 어깨를 단단히 맞대고서야, 비로소 수국은 비로소 하나의 둥근 세상을 완성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진 여름이 오기까지 부단히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모습에서 나는 삶을 향한 경외심을 배운다.
보랏빛 설렘이 눈물겨운 하늘색 추억으로 번져가는 이 아침노을빛조차 머물다 가는 수국 정원에서, 비로소 인내라는 긴 터널 끝에 맺힌 평온의 향기를 맡는다.
솜사탕처럼 피어난 저 꽃들이 말해주는 듯한다. 그간 고생 많았다고, 당신은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먼 훗날까지 기약 없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