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타 부서 직장동료가 아침 일찍 내 사무실로 와서 "김영미, 얼른 와!"라고 한마디를 던지고 가버렸다. 대여섯 살 어린 동료인데 진즉에 내 마음을 읽어버려서 대놓고 깡패짓이다. 목청껏 제멋대로인 듯 하지만 퇴근길에 차창을 열고 걸어가는 내 뒤통수에 "김영미!"라고 하면서 손을 흔들고 지나가는 정 많은 친구라 내가 애정하는 친구다. 그런 친구가 오라고 하니 열일 제쳐놓고 따라갔다. 그곳엔 이미 몇몇이 모여있었다. "얼른 오라니까, 예쁜 건 먼저 온 사람이 다 차지해 버렸잖아!"라고 말하면서 꽃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꽃이라 이름을 물었다. 아무도 그 꽃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사무실에 두고 보고 싶었으나 주말이라 집엘 가져와서 보고 또 보고 볼수록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 꽃을 준 그 친구를 생각하고 있다.
상대도 나도 서로 긴 말을 하지 않아도 깊은 대화가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주변에 그런 깊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래도 살만하다. 그러고 보니 전전 근무지에서 임기 끝에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어서 많은 직원들 앞에서 양해를 구하고 파트너로 함께 일했었던 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면서 고마움을 표했었던 기억이 있다. 한 명 빼고는 모두 임기가 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없었으나 그들의 이름을 꼭 불러주고 싶었었다. 매년 한 명씩 내 파트너가 되어 함께 일을 했었는데 모두 그야말로 최고의 인성을 갖은 깊고 따뜻한 이들이었다. 서로 사람이란 걸 확인시켜 주면서 온기를 느끼며 기대어 사는 게 찐 인생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가깝게 지내는 남편과 큰아이가 나를 향해 같은 말을 했다. 앞뒤가 똑같다고, 투명인간이다고. 그렇게 말하는 남편이 언젠가 내게 한마디 했다. "당신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 안 한다."라고 말했다. 느껴지는 뉘앙스가 '당신은 신뢰할만한 사람이야.'라는 느낌으로 느껴졌다. 남편의 말을 듣고 궁금이 생각해 보았다. 모두에게 상처이면서 말할 수 없이 아픈 지난 일이거나 좀 다른 아픔인데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일, 그런 일들은 입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과는 별개로 남녀가 결혼을 하여 각자의 본가에 대한 다름에 대해 얘기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 스스로 철칙처럼 지금까지 지켜온 규칙이 있다. 불편하거나 아픔으로 다가오거나 하는 다름의 결과물들에 대해서 남편에게는 솔직하게 말을 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당사자 즉 시댁식구들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는다 해도 굳이 말할 필요가 없고 함구가 답이라고 생각한 까닭일 거다.
남편은 본인의 본가와 처가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낼 만도 한데 삼십 년 결혼생활 동안 내게 조차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딱 한번 뭐라고 말을 꺼내려고 하려는 걸 느낀 적이 있었다. 그때 얼른 "당신은 대단해, 어떻게 처가 험담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분명히 힘든 적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입을 막았었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처가 터가 좋다는 둥, 외가식구들의 머리를 닮아서 아이들이 머리가 좋다는 둥 덕담을 수없이 해서 고맙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사람이 사노라면 별의별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간혹 일이 힘든 건 얼마든지 헤쳐나갈 수 있지만 사람이 힘든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매사 복잡다단한 것 같지만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면 세상 단순한 게 인간사다. 오해와 갈등으로 헤쳐 나오기 힘든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정면돌파를 할 필요도 있고 간혹 단절이 답일 경우도 있다. 상대적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내 안에 답이 있는 게 대부분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하기는 쉽지 않다. 스스로 다독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객관화도 해보고 스스로 솔로몬도 되었다가 석가도 되었다가 내 안에서 답을 찾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삭막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로또에 당첨될 확률일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나를 더 생각해 주고 이해해 주는 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것. 그건 로또에 당첨된 그 이상의 삶이 아닌가 한다. 슬픈 예일수도 있지만 착각도 건강하게 사는 지름길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내 남편이 내게 보낸 깊은 신뢰를 보약으로 느끼면서 살고 있다. 더불어 이것도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깊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이들이 아직도 내 곁에 존재함을 느끼면서 산다. 알고 보면 로또는 사지 않았어도 종종 로또에 당첨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삶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내 마음속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스스로에게 파이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