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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Mar 03. 2024

나 하나 감당하기에도

  별 걱정이 없으면 침묵에 압사당할 것 같고, 사람들과 북적거리다 보면 그런대로 스트레스 폭탄이고, 쉽지 않다. 성인이 되면 부모님 밑에서 사는 것도 힘들고 그런데 낯선 사람과 결혼을 자청해서 굳이 안 맞는데 맞춰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산다. 그러다 이제는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훌훌 내 곁을 떠나 산다.


뿐만 아니라 주말부부다. 주변 동년배분들이 내게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고 심하게 부러워한다. 그렇게 우리네는 변덕이 죽 끓는 것도 아니고 혼자라서 좋다고 했다가 또 그게 힘들다고 했다가 같이 살고 싶어 묶여서 살았다가 따로 살아서 천국이라고 했다가 참 어느 것이 진심인지 헷갈리지만 그렇게 요동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얼마 전 아직 정년이 몇 년 더 남았는데 갑자기 내 직종이 사업종료될 수도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시시각각 요동치는 사회현상에 뉴스는 그냥 뉴스지 나와 별개라는 생각으로 접하곤 했는데 어쩌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을 맛봤다.


먼저 당장 난 날마다 뭘 하며 살지? 글을 쓰며 살까? 그림을 그릴까? 텃밭을 하면 되겠네. 자문자답을 해보지만 허전하고 왠지 직장엘 안 가면 날마다 너무 막막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한참을 경단녀 생활을 했었는데 그때는 아이 셋의 육아에 사활을 걸고 뛰는 여전사가 따로 없었으니까 하루가 날마다 꽉 찼었다.


주변에 전업주부들이 있다. 그분들은 나름의 일정에 같이 만나려면 맞추기가 여간 쉽지 않다. 적응의 동물이라고 나도 언젠가는 퇴직을 할 것이고 또 그분들 못지않게 익숙하게 잘 살 것이다. 하지만 빈 여백을 어떻게 채워가며 살 것인가,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잔잔한 호수도 가까이서 보면 쉼 없이 움직인다. 퇴직하고 혼자라는 호수에 갇히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수십 년을 살아낸 인생이지만 늘 처음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예측이 안된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이 두렵지 않고 섭섭한 것보다는 시원할 것이라고 떵떵거리곤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당겨질 수도 있다는 상황이 되자 어떻게 살아야 될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시끌벅적거리던 시간들이 주는 생동감을 나 혼자서는 도저히 연출할 수 없다. 뉴스처럼 진짜로 사업종료되어 퇴직이 앞당겨질 때까지 마치 파티처럼 즐겨볼 생각이다. '저분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을까?'라고 생각이 들던 상사나, 아리송해서 도대체 그 속을 알 수 없었던 몇몇 분들도 '호호, 그러실 수 있죠!'라고 생각할 것이다.


복직해서 십 년이 넘었다. 간혹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도 있었고 가벼운 처우에 어울리지 않는 난코스의 업무도 있었지만 무료한 인생에 활력이 되었던 직장이었다. 막내가 중학교를 입학하자 시작한 직장생활은 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준 고마운 일터였다.


생의 주기마다 정면으로 마주한 나 자신은 쉬이 감당이 안된다. 지나고 보니 다시 직장을 다니게 되기 직전에도 참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때는 너무 젊은데 긴긴 시간을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쭉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게 힘든 포인트였었다.


지금은 다들 정년퇴직하는 게 뭐 당연한 수순인데 이상할 것도 없는데 뭐가 어쩐다는 건가, 이럴 수 있는 시기라 그냥 만석꾼처럼 펑펑 시간을 써도 된다는 건가,, 이게 나의 걱정 포인트다. 또한 뭐도 치열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간절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을 감당하기가 또한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등대도 뭐도 없이 망망대해에 홀로 붕붕 떠있는 나는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늙는 것도 처음이라 물음표 투성이다. 물음표 그것 신선하다. 아직 두 다리가 성하니까 물음표 옆에 느낌표를 가져다 놓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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