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지혜, 부모자식
아직은 그래도 중년일 수 있을까? 육십이 아니니 노년은 아니지 않을까? 어떻든 문제는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지혜의 창고다. 그렇게 많은 세월을 살았는데도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대해 이게 맞나? 스스로를 의심한다. 가끔 남편에게 내 생각은 이런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곤 했다. 신중할수록 나쁠 게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에는. 답은 이미 정해놓고 난감할 경우 하소연일 경우도 있고 자기 확신이 필요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십 대 때는 진짜 많이 진정한 조력자가 필요했었다. 중요한 결정 앞에 나만큼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이가 있어서 현명한 결정을 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결국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판단하고 결정했었다. 육십을 코앞에 둔 지금은 적어도 나의 일신과 관계된 일들은 고민은 할지언정 결정은 주저하지 않고 한다. 그 결정이 무엇이든 그 결과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은 나의 문제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모로서의 나, 그게 문제라면 문제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아이들에 관련해서도 큰 부담 없이 결정했었다. 큰 부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깊은 고민 그리고 중요할수록 기꺼이 지혜를 나눠줄 분들께 SOS를 청했었다. 그때마다 아이들을 위한 결정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미련도 후회도 없다. 주저하고 망설이지 않아야 해결되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뒤가 깔끔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자식의 일은 또 다르다. 분명히 자기 판단이 있다. 그 판단에 대한 판단을 부모로서 해야 되는 게 맞나? 하는 것과, 자식의 일 앞에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 세상에서 부모 말고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서로 충돌한다. 넘어져도 보고, 아파도 보고, 그러면서 성장하라고 하는 게 답일 것 같다. 이론상으로는.
그러나 현실은 또 다른 문제다. 모든 결정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중 하나가 타이밍이다. 거부할 수 없는 인생 주기가 있다. 그 결정이 자신의 인생 주기에 얼마나 큰 영향이 미칠 것인가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 속에 들어 있을 땐 자기 객관화가 어려워진다. 대부분. 당장 아프다고 피한다고 그게 경험이라는 '힘'이 되어 주면 좋으나 내내 '짐'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걸 깨닫게 조언해 줄 필요가 있다. 적어도 부모자식관계라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부모도. 원망도 감래하고 과감하게 조언하지만 속으론 못지않게 아프다. 부디 그 결정이 자식의 앞날을 위하는 결정이었다고 확인되는 날이 오길 바라도 본다. 신은 더 어려운 생을 살고 있는 자를 위해 힘써야 하니 부모를 대신 보냈다고 했던가? 인생을 좌우할 일 앞에 부모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한없이 작아지는 부모는 참 어렵다.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자식에게 엄히 대해야만 했던 부모는 엄한 스스로의 모습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팔순 부모가 육십 인 자식에게 차조심하라고 당부한다는 그 말을 위안 삼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 큰 자식에게 조언하는 부모는 더없이 부담스럽다. 그 힘든 일을 자청하는 게 부모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렇게 살아간다. 텅 빈 지혜의 창고를 확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