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좌충우돌, 그것의 반복이 청춘일까?
가끔 내가 나를 모르겠고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이 조각되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내면은 자신의 몫이지만 타인의 시선과 표현이 모아져 내가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무엇에 의해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단단하게 잘 자란 나무처럼 흔들릴지언정 뿌리째 뽑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뿌리도 위협받고 여전히 흔들리고 아파한다.
가끔 거울 속의 여인을 보면 무색무취의 목석이 되어가는 듯 무표정하다.
밑천은 열악하나 표정만큼은 살아 있었다. 근데 그것마저 잃어간다니 무슨 방어기제인가?
살기 위한 무의식의 발로인가, 안타깝다.
사랑, 이별 등등 다양한 삶 속에서의 번뇌의 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생활인으로서의 원초적인 인권 그리고 자존감 그것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끝에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무표정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끝까지 난 아직 살아 있다. 이게 바로 나다. 남다른 노력까지 하였으나 어쩌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 걸 받아들였다.
쓸쓸하다거나 슬프다는 감정마저도 일단정지 상태다.
단지 얼마 남지 않았다. 끝이 있다는 게 희망일 수 있다는 것까지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살기 위해 나를 버린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세상 속에는 네가 모르는 게 무수히 많단다." 이렇게 말하는 걸 체험했다.
일상을 이걸 알려주는 이들 속에서 허우적거렸었다.
얼마 전까지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 새로이 알게 된 것을 원치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체험했다.
그 대표적인 게 눈이 하나인 이들 속에서는 눈이 두 개인 자가 이상한 자라는 거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내가 무표정한 것을 스스로 모른 채 해야 한다.
견딘다. 버틴다. 잠깐 스스로를 포기한다.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건 기간이 유한하다는 거다.
내 할 일을 하되 상처를 주고도 사과는커녕 무례가 습관인 이들에게 인간적인 기대를 하지 않아야 살 수 있다.
그걸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슬프지만 적응의 동물이 인간이기에 나름의 호흡법을 터득할 것 같다.
햇살 좋은 양지에서 연노랑 병아리와 어미닭이 거니는 그림 같은 따뜻함을 젊은 날 직장생활에서 경험했었다.
일은 많고 힘들었지만 우리 부서 구성원들은 서로가 힘이 되어주었고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그분들을 그리워한다. 경단녀가 재취업을 하여 십 년을 훨씬 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정년을 앞둔 상황에서 견뎌야 한다는 해법을 선택해야 하는 게 한없이 슬프다.
아직도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걸 나는 원한다.
직장생활도 중요한 내 인생이기에 가식 없이 진실되게 서로 정을 나누며 살고 싶다.
아쉽게도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 필수불가결한 생활 그 이상도 또 그 이하도 아닌 듯이 살아간다.
어리석게도 그 와중에 따뜻한 정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자 하는 꿈을 완전히 접지 못했다.
내 공간에 새로운 파트너가 전근을 왔다.
그래서 꿈꾼다.
서로에게 산소통은 물론이고 삼십 년 전 직장 동료를 그리워하듯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