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보다

4. 하늘

by 바보

하늘은 푸르다. 그런데 나에게는 상황에 따라 하늘빛이 달라 보였다. 어린 시절 살았던 주안 염전 마을, 우리 집 마루에서는 널따란 하늘이 보였다. 집집이 마당이 꽤 넓어서 집 앞으로 꽃밭과 텃밭이 있었고 그 위로 하늘이 펼쳐졌다. 하늘을 오래 보는 시기는 대개 여름이었다. 찌는 듯한 햇볕에 꼼짝할 수 없을 때는 하늘을 보는 것 외에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바깥으로 나갔다가 더위에 쫓겨 집안으로 들어올 때면 마루 끝에 있던 다듬잇돌 위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돌에 누우면 입이 돌아간다고 엄마가 야단을 쳤지만 그 시원한 다듬잇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빨간 나리꽃이 고개를 숙인 장독대 옆 평상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보기도 했다. 매미가 야단스럽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파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구름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밤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넓은 공터 위에 멍석을 펼쳐놓고 이야기꽃을 피웠고 아이들은 멍석 위에 누워 별들이 요란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는 날에도 마루에 누워 흐린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 하늘에 나타나는 검은 구름은 웅장하고 장엄했다. 봄가을에는 뛰어놀기 바빠서 한가롭게 하늘을 바라볼 틈이 없었다. 엄동 추위로 방 안에 갇혀 지내야 했던 겨울에 성에가 두껍게 낀 유리창을 입김으로 불어서 밖을 내다보면 차갑게 파란 하늘이 매섭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런 하늘도 반갑고 좋았다. 어린 시절의 하늘은 낮이나 밤이나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고3 소풍날이었다. 송도유원지 방파제에서 바라본 바다와 하늘이 하얬다. 해무가 끝없이 퍼져 있었다. 시야가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대로 방파제 위에 주저앉았다. 사막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막막하고 허무했다. 고3의 소풍엔 노래도 장기 자랑도 없었다. 점심만 먹고 각자 해산이었다. 2시간 넘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도 여전히 울타리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그 쓸쓸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허허벌판에서 떨고 있는 유기견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의 느낌은 오래 지속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낯선 세상이 끝없이 펼쳐졌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나를 온통 지배했다. 대학에 가서도 내가 보는 하늘은 그대로 희뿌연 빛이었다.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학교 앞 거리를 오가는데도 세상은 안개가 낀 것처럼 무채색이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곁에서 누군가 떠들고 있어도 들리지 않았고, 나란히 앉아 있어도 홀로 있었다. 모든 게 영화 필름처럼 보였고 나는 안개에 갇힌 선박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잠깐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삶이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파란 하늘은 사라졌다. 하늘은 날마다 칙칙한 회색빛이었다.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맑은 날은 내게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이 잿빛으로 짙어졌다가 나중에는 검은빛이 되었다. 검은 하늘에 짓눌려 질식할 것 같은 날에는 비명을 질렀다.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들을 흩어버리고 싶었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연명하듯 하루하루 신음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검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버티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포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탁 놓아버렸더니 나를 누르고 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린 시절 보았던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그때부터 무슨 일에든 기를 쓰는 버릇을 내려놓았고 가벼워지는 길을 선택했다.


창밖으로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이제는 파란빛이든 희뿌옇든 회색빛이든 하늘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도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도 아름답다. 돌이켜보면 긴 시간 시야를 막고 나를 괴롭혔던 희뿌연 하늘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나를 짓눌렀던 검은 하늘은 욕심과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 마음이 하늘빛을 만들어 냈다. 하늘은 그냥 하늘이다. 흐린 날도 있고 개인 날도 있다. 하늘은 파랗다. 흐린 날에도 가려져 있을 뿐 구름 위에 그 파란 하늘이 있다. 너무 늦게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만든 하늘에 갇혀 지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는 훨씬 덜 고통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늦게라도 하늘빛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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