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보다

3. 머무는 바 없이

by 바보

고향 마을과 집이 아직 그대로 있는 이들을 보면 부럽다. 고향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다. 그러나 내 고향 마을은 중학교 때 매립으로 사라졌다. 마을을 둘러싸고 봄이면 그야말로 꽃 대궐을 만들던 산들이 무너져 염전과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이사를 해서 다시 고향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마을도 얼마 전에 재개발로 사라졌다. 두 번씩이나 고향을 잃어야 했으므로 나는 슬픔을 넘어 분노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 여기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정신의 소유자다. 하지만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어느 강의에 참석했다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세상에, 이렇게 좋은 말씀이 있다니.’ 하면서 깜짝 놀랐다. 내 부탁을 받고 강사는 그 말을 칠판에 적어 주었다. 몇 번이고 읽어 보아도 가슴 설레는 명언이었다. 집으로 달려와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을 해 보았다. 그 말씀의 장본인은 12세기 생 빅토르 후고로 되어 있는데 그의 이름 앞에는 각기 다른 명칭이 붙어 있었다. 그를 신학자로 일컬은 글도 있고, 사상가로 소개하기도 하고, 철학자로 분류한 이도 있었다. 그에 대한 명칭에 따라 고향에 관한 그의 말을 여러 각도로 각기 다르게 해석해 놓았다.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곡조보다는 가사 때문에 노래를 좋아했다. 노래를 부르면 가사 말이 온몸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배운 노래는 집에 와서 반복해서 불렀다.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가고파’를 처음 불렀는데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비록 내 고향은 남쪽 바다가 아니라 서쪽 바다였지만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고향 바다였다. 어릴 때 같이 놀던 고향 동무들도 보고 싶었다. 그 뒤로 ‘가고파’는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때면 가장 먼저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 노래 때문에 간간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절절한 그리움이 애끓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지난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인간이 겪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니까 자주 허공을 바라보게 된다. 내 나이쯤 되면 저 세상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 같다. 어느 때는 땅을 밟으면서도 지구를 떠난 기분이 든다. 절반은 이 세상에서 절반은 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인생은 나그네길”로 시작되는 최희준의 ‘하숙생’ 노래 가사가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우주를 여행하는 나그네이고 모든 곳이 타향이며 어디서나 이방인이다. 매립과 재개발로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원망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차피 잃어버릴 고향이었다는 것을 안다. 어느 곳에서도 영원히 머물 수 없다. 아직은 ‘가고파’를 노래하면서 눈물짓지만 언젠가는 울지 않게 될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라.” 내가 퍽 좋아하는 구절이다. 생각할수록 가슴에 새록새록 와닿는다.

이전 02화저녁에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