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보다

1. 시간 부자가 되다

by 바보

나이가 들어 저절로 시간 부자가 되었다. 남아도는 시간에 자꾸만 내가 살아낸 지난 시간을 돌이키게 된다. ‘나’라는 존재에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자신을 크고 강하게 키우는 게 잘난 사람이 되는 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나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 늘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았다. 나에게로 향하는 남들의 시선을 감당하는 건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직장에서 긴 세월을 보냈으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연기를 펼쳐야 할지,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시간을 돌아보면 거친 바다를 위태롭게 항해했다는 느낌이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복을 벗게 되었을 때 나에게 어떤 옷을 입혀야 하는지, 큰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귀밑 몇 센티 단발머리 규정이 없어진 머리카락과 오리표 운동화 대신 발에 신겨야 할 신발, 책가방을 버리고 들어야 할 가방도 부담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옷과 구두와 가방은 멀리서 봐도 싸구려 티가 났다. 양장점이나 제화점에서 맞춘 옷이나 구두는 시장 물건과 가격 차이가 엄청났다. 남들은 어떤 옷을 입었나? 구두는? 가방은? 헤어스타일은? 힐끗힐끗 곁눈질을 하고 다니는 자신이 구차스럽게 느껴지면서도 값비싼 옷을 입은 이들을 보면 움츠러들었다. 취직을 해서 월급을 받게 되었을 때 유명 메이커 의상과 구두와 가방을 구해서 뽐내고 다녔는데 금방 시들해졌다. 그러나 비록 그게 외모는 아니어도 나를 가꾸고 내 인생을 치장하는 일이 여전히 내게는 중요한 관심사였다. 누가 출세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내가 낮아지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나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자신을 부추기고 응원하며 지냈다.


동료들과 여행을 갔을 때였다.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들이 드러났을 때 몇몇 얼굴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비록 얼굴 화장은 하지 않고 지냈지만 나 역시 다른 방식으로 나를 포장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벌였던 것 같다. 화장을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여성들의 화장이 남편이 벌판에 내다 버릴까 봐 생존을 위해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화장의 역사도 변천을 거듭했을 테고 요즘 사람들은 다른 목적으로 화장을 할 것이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의 현장은 어디나 전쟁터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남들과 경쟁을 하고 타인의 공격에 대비도 해야 한다. 나 역시 남들이 내 부족함을 알지 못하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만든 포장지와 두꺼운 가면 속에 갇혀서 놓쳐 버린 것들이 많았다. 애석하게도 단지 나를 지키고 방어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생각과 감정을 소비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직장에서 물러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레 무장 해제가 되었는지 나를 가두어 두었던 무거운 갑옷과 가면 같은 것들이 저절로 벗겨졌다. ‘나’라는 껍질을 벗고 만나는 세상은 이전에 내가 알고 지내던 세상과 달랐다. 보다 넓고 시원하고 편안하고 밝았다. 진즉에 나를 벗어버릴 수 있었더라면 살아가는 게 훨씬 즐겁고 수월했을 것이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실수투성이여서 한스럽기도 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의 고통은 나 홀로 겪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류 역사 내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이라는 데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전에 인적 없는 구도심을 걸을 때였다. “어? 지구가 망한 거야? 왜 우리뿐이지?” 지인의 질문에 내가 되물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나? 나이 들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북적이는 전철을 타거나 혼잡한 인파 속을 걸을 때도 종종 지구에 혼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노인들이 고립감이나 단절감으로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지만 나는 아직은 타인들의 부재가 마냥 기분 좋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남들의 시선을 속박처럼 힘들어했던 시간에서 벗어난 게 고맙다.


옷이나 신발, 가방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내는 것도 나에게는 즐겁고 기쁜 일이다. 옷걸이에 외출복을 하나 걸어놓고 교복처럼 입고 다닌다. 신발은 언제나 발이 편안한 운동화를 신는다. 가방은 지갑과 핸드폰과 휴지와 손수건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것을 어깨에 걸치고 다닌다. 오래 살았던 동네에서 멀리 떠나와서 시장에 가거나 산책을 나가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그리고 더 이상 재산, 권력, 학벌, 외모, 명성 같은 것으로 경쟁하는 세상의 게임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나를 홀가분하게 한다. 이 세상 누구와도 경쟁할 게 없고 비교할 게 없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 그 자체로 완전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늦은 나이에나마 어렴풋하게 깨닫게 되어 기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