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별거 아니다
서둘러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궂은 날씨에도 집을 나섰다.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 내려 큰 우산 아래로 빗물이 마구 들이쳤다. 물이 흥건하게 배어서 질퍽거리는 신발과 축축하게 젖은 양말과 바지가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세상을 원망하면서 온갖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공중전을 제법 치러낸 이 나이쯤 되고 보니까 사람 사는데 어찌 맑은 날만 있으랴, 하는 배짱이 생기는 것이었다. 분명 내가 해결해야 할 괴로운 과제이긴 하지만 젊은 날보다는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폭우가 쏟아지는 빗길을 한참 걸어 전철 역사에 들어서자 일단 한숨 돌리기 위해 쉴 곳을 찾았다. 역사 안은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의자가 있었다. 어깨를 눌렀던 가방을 내려놓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역사 의자에 앉아 도넛과 음료수를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기도 하고 곁을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이 머무는 속에서도 나는 기분 좋게 달콤한 도넛을 먹어 치웠다. 아는 사람이 지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너무 변해서 나를 못 알아볼 거야, 하는 생각이 앞섰다. 뭇시선 속에서도 그 시선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굉장히 편안했다.
긴 장화를 신은 젊은 여자가 뽐내듯 다가왔다. 한껏 멋을 낸 여자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게 분명했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 청치마에 하얀 물방울 블라우스를 입고 기분 좋게 빗속을 걸었다. 교정의 푸르른 나무 냄새와 맑고 시원한 공기와 귀를 즐겁게 하는 빗소리와 장화에 부딪치는 물방울이 나를 즐겁게 했다. 사는 게 참 아름다운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때 장화는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전교생 중에서 장화를 신을 수 있는 아이가 몇 안 되었다. 고무신이 진흙에 빠지는 게 거추장스러워서 비가 오는 날에는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 다녔다. 대학생이 되어 비로소 장화를 신고 신바람이 났던 것이다. 그때의 나 역시, 나 좀 보세요, 나 예쁘잖아요, 하면서 걸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희뿌연 비구름 속에 반쯤 가려진 고층 빌딩 숲을 걸었다. 장화 하나에도 큰 기쁨을 느끼던 그 시간에서 나는 아주 멀리 와 있었다. 그러나 작은 일에도 가슴이 뛰었던 그 시간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과 내가 놓인 환경에 얽매이고 구속을 당하던 몹시 불안하고 불편한 시기이기도 했다. 마침내 온통 유리로 뒤덮인 높은 빌딩 앞에 섰다. 안내 데스크에서 신용카드를 맡기고 출입증으로 교환을 하면서 현대 문명이 신기루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연세에 이렇게 빈틈없이 서류를 준비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는 사무원의 눈빛에서 나는 찬사가 아닌 내 외모를 확인했다. “내가 늙은이인 건 맞아요. 그렇지만 이거 별거 아닙니다, 286 컴퓨터부터 사용한 사람입니다.”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인생은 게임과 같은 게 아닐까, 사람마다 난이도가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제로 현실을 살아가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살이가 권투 선수나 레슬링 선수가 올라서야 하는 링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살벌한 링 위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나이를 먹게 되면 링 아래로 내려오는 것, 그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링 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구경꾼이 된다면 인생을 게임처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른이 되면 재미없는 인생이 펼쳐진다고, 의무와 무거운 짐만 주어지고, 외모는 추하게 변한다며, 서른 살 자살 클럽을 만들자, 소리를 지르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아마 지금쯤은 나이가 펼쳐 보여 주는 것이, 나이가 가르쳐 주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오래오래 살아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일을 마치고 얼마 전 떠들썩하게 개장했던 백화점 구경에 나섰다. 평일 비 오는 날 대낮인데도 사람들이 붐볐다. 젊은이들 속에 앉았다. 나는 배를 채우기 위해 먹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음식이 아니라 환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이들은 매장에 진열된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명품 진열대를 기웃거렸다. 그렇게 욕망 속에서 행복을 찾던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백화점을 나와서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며 어디선가 들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인생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게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