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도라에몽에게 이끌려가는 진구처럼 나는...

by 평온

빨래를 개려고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티브이를 켰다. 자연을 꽤나 좋아하는 한 연예인이 잠자리채로 나비를 잡고, 그물로 1 급수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 나온다. 내 모습과 겹쳐 보인다. 요즘의 나는 나비처럼 휙 날아가는 삶의 장면장면을 잡아채 글이 될지 따져본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이 요리조리 빠져나가 사라지기 전에, 잡은 물고기를 조심스럽게 채집통에 담는 그처럼 나도 재빨리 노트에 적어둔다. 노트가 없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우뚝 선 채 폰에 메모해 둔다. 이런 내가, 나도 낯설다.


나에게 글은 돈벌이 수단이었다. 95년, 지방자치제도가 시작되면서 과 후배의 소개로 기초의원 후보자들의 선거 유세문을 대여섯 개 썼다. 원고 당 들어오는 쏠쏠한 수입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후보자들의 당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풀뿌리 민주주의, 주민을 위한 유일한 일꾼’ 등 동일 어휘의 반복, 공약조차 변변치 않은 허장성세의 문구에 진저리가 나서 한 해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97년에는 웅변 글쓰기 학원을 시작했다. 글짓기 학원을 인수받았는데, 글은 억지로 짓는 게 아니라 삶을 쓰는 거라는 의식을 가진 원장들이 글쓰기 학원으로 이름을 바꿀 때였다. 권정생, 이오덕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 대회에 참가하는 아이들을 준비시키며 남북통일, 교통안전과 불조심에 관련된 웅변 원고를 계속 써냈다. 알맹이가 없는 외침들이었다. 내세울만한 상을 받기 위한 글‘짓기’ 수업에 열을 올렸다. 아이들에게마저 삶과 동떨어진 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신념과 밥벌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30대 초반의 자괴감은, 결국 5년 후 학원을 넘기며 끝이 났다.


그렇게 나는 글쓰기와 멀어졌다. 글 쓰기가 싫었다. 내 정신과 영혼의 가난함이 문장마다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을까 봐, 나의 얕고도 좁은 사유가 문단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봐 도망 다녔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한 서점에서 <아티스트 웨이>라는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다. 사전 지식은 전혀 없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창조성과 예술성을 끄집어낸다’는 말에 끌렸다. 허한 가슴만 빈 껍데기처럼 끌어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혹시 내 안에도 진주 하나쯤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나 보다.


매주 1회 2시간, 12주 동안 회고록 쓰기를 이어갔다. 다이어리 3쪽을 반드시 손글씨로 채워야 하는 모닝페이지도 성실히 썼다. 첫날 쓴 노트를 펼치니 “내 안에서, 내 손끝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보자”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렇게 내 안을 들여다 보고, 우물물을 길어 올리듯 글을 퍼 올리며 점차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내 영혼 깊숙이 박혀있던 가시도 많이 말랑해졌다. 동시에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반성과 후회, 흐느낌으로 가득한 글은 열기를 잃었다. 밥벌이를 위한 글짓기, 자기 성찰에서 벗어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것인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방문객> 중


글은 ‘그 사람’이다. 나는 언어라는 집에 내 삶을 진솔히 담아 그를 초대한다. 그리고는 언어라는 옷을 정중히 입고 도착한 그를 환대한다. 나와 그의 세상이 만나고 교차하며, 더 큰 우리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살면서 꿀꺽꿀꺽 삼키기만 했던 내 말들을 딱 맞춤한 단어를 찾아내 세상에 내놓고 싶은 마음이 갓 사랑에 빠진 청춘들의 설렘처럼 간질거린다.


다이어트 시기 제일 무서운 게 입 터짐 증상이란다. 나는 요즘 글터짐 증상을 앓고 있나 보다. 꾸역꾸역 바지 지퍼 속에 감춘 살들이 비어져 나오듯, 내 우물 속에 감추어 두었던 내 말들이 통행금지 신호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툭툭 튀어져 나온다.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간다. 도라에몽의 손에 이끌려 낯선 세상의 문을 연 진구가 된 느낌이랄까? 글쓰기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