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밟기 놀이

어머니의 손편지 (2)

by 평온

(따르릉~~. 오후 8시, 한창 저녁 먹던 중)

- 일요일에 약속 이시냐?

"아직은 어신디, 무사 마씸? “

- 중문 컨벤션 센터에서 허는 중소기업 박람회에 놀러 가게.

"알아수다."

- 고맙다.


이미 한 차례, 자식새끼들 중 그나마 가장 다감한 둘째에게 전화했다가 가봐야 볼 거 하나도 없다, 시간도 없다 거절당한 옥자 씨는 까칠한 현이에게 전화하면서도 단박에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다가 현이의 오케이에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야야, 저거 산방산 아니?”

"예."

“아이고, 산방산을 십몇년만에 봠쪄. 영 나오니 시원하고 좋은걸. 동네 노인정에 가난 할망들이 물어라. 자식들이 구경도 많이 시켜 주냐고.”

"뭐랜 고릅디까?

“뭐랜 해? 다들 바빵 그럴 시간 없댄 고랐쥬.”


허리 수술 후 걷지도 못하다가 매일 오후 4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유모차를 끌며 운동한 지 수개월, 이제 겨우 지지대 없이 걷기 시작한 옥자 씨는 동네 노인정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사는 얘기로 통성명을 시작하던 옥자 씨, 85세 이상의 언니들이 많은 노인정에서 제일 막내인데 아프고 잘 걷지 못해 거죽(?)은 제일 많아 보인다며 제 나이를 숨기고 싶어 합니다.


자식들이 시간이 없어 구경도 제대로 못 시켜 준다고 대답했다는 말에 현이는 뜨끔합니다. 산방산 풍경만으로 환호하는 제 어머니 모습을 보며, 노인정에서 기죽지 않고 자랑할 수 있게 자주 모시고 다니며 콧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박람회장은 둘째 딸의 말처럼 볼 게 없습니다. 사실 옥자 씨는 TV에서 연일 <중소기업 박람회> 광고를 볼 때마다 눈독 들이던 게 있습니다. 바로 요실금에 좋다는 의자입니다. 두 번이나 수술을 했지만 요놈의 요실금이 썩 좋아지지 않아 그 의자를 꼭 만나보고 싶어 아이들을 조른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안마의자와 별 다를 것도 없는데 특별가로 인하해 판다는 게 200이 넘습니다. 그 말에 옥자 씨는 슬그머니 의자에서 엉덩이를 빼 휠체어에 앉고 딸에게 다른 데로 가자고 합니다.


마침 어느 농협이랬던가, 구기자 설명을 잔뜩 들으며 받은 비누, 치약, 구기자 즙을 제 몫과 딸 몫까지 2개씩 알뜰히 챙겨 넣었습니다. 무릎에 바르면 좋은 연고식 파스 두 통을 반값에 사고 돌아갑니다. 그래도 옥자 씨는 서귀포까지 운전해 와 준 큰 딸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합니다. 심심할 뻔했던 하루가 이렇게 웃으며 지났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게 맞습니다.


누워만 지내야 했고, 누가 일으켜 줘야만 일어날 수 있고, 방에 소변기를 넣고 지내던 날들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지요. 하지만 옥자 씨는 속이 상합니다. 스스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나름 당신의 일에 자부심도 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자신이 보잘것없다 느껴집니다. 자식들의 냉랭한 목소리 하나에도 내가 지들을 어찌 키웠는데 싶어 섭섭하고, 글자 하나 틀리게 썼다고 깔깔 웃는 아들놈이 자신을 무식하다고 놀리는 거 같아 노엽습니다.


현이는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상 깊은 대목 하나 .


-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쳐지면 더 진할까요? 그대로일까요?

- 글쎄요.

문답을 주고받던 두 남자는 어두운 공원, 가로등 밑에서 그림자밟기 놀이를 해 봅니다.

- 이리 와 보세요. 한 번 겹쳐 봅시다. 좀 진해지는 것 같아요.


현이는 어쩌면 지금 자신의 엄마와 그림자밟기 놀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다다다~~ 부모에게서 받아야 하는 게 사랑이라는 것조차 몰랐던, 어린 소녀였던 엄마의 그림자를 현이 밟습니다. 서로의 결핍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깡충~~ 사랑을 받아본 적 없기에 자식에게도 그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20대의 엄마의 그림자를 밟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그 사랑을 의심하고, 그게 사랑인지 묻는 20대 젊은 현이의 그림자가 그 위에 겹쳐집니다.


30~40대 육아와 일에 지쳐 울고 싶던 어느 날의 현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몸을 관통하는 통증으로 눈물짓던 엄마의 그림자가 만나 서로를 가만가만 토닥입니다.


뚜벅뚜벅~~ 이제 50대 중반, 큰일집에서 프로답게 척척 일을 해 내던 엄마와 작지만 알차게 가게 일을 꾸려 나가는 자신을 가만 겹쳐 봅니다.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겹치면 확실히 진해 보입니다. 엄마로서의 삶과 장녀로서의 삶을 살아온 두 여성의 그림자가 겹쳐지니 서로의 수고로움을 쓰담쓰담 위로해 주는 기분입니다.


깜깜하기만 하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습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생기는 것. 현이는 자신의 삶에서 빛과 그림자를 가만 들여다보며, 자신의 음지가 부모 탓이라면, 자신의 양지도 부모덕임을 깨닫습니다. 살아 있음, 그래도 지금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에는 현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가장 크겠지만, 어머니와 형제자매에게도 그 지분이 있음을 아는 나이가 되어갑니다.


언젠가 또 옥자 씨는 쓰러지고, 자리에 눕게 되겠지요. 그래도 옥자 씨, 부디 자식들에게 폐 끼친다고 미안해하지 말아요. 우리가 이제 당신의 삶에 답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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