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부터의 기록
2018년 6월. <고향집을 떠나다>
지방 선거일이었다. 선거를 마치고 찾아간 시댁, 안방 침대에 두 분이 나란히 누워 계셨다. 몇 주 사이에 아버지 몸피가 반으로 줄어 있다. 치매인 어머니는 주간 보호센터에 가서 끼니를 해결하셨다. 아버지는 노인정에서 하루 한 끼는 해결해 오셨는데, 고관절이 안 좋아 걷기가 불편해지면서 발을 끊은 지 오래되셨단다. 끼니 때우기가 귀찮아 라면 한 봉지가 하루의 식사였던 듯. 자식들이 해다 놓은 반찬이 냉장고 안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두 분 다 큰 일 나겠다 싶어 짐을 쌌다. 예전에는 같이 가자고 해도 완강히 거부하시던 아버지가 아무 말없이 지갑과 통장, 도장을 챙기시며 따라 나오신다. 어머니는 큰 시누이 집에서,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모시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소파에 누우신 아버지, 방은 막혀 있어 답답해서 싫다며 꼭 거실 소파에서 주무시겠다고 고집이시다. 당신 지갑과 통장을 내게 건네며 이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지낼 거니, 니가 알아서 관리하라고 하신다. 어머니를 돌보는 시누이에게 매달 100만 원씩 보내기로 했다.
2018년 7월. <돌봄에 대한 양가감정>
나는 오후에 일을 한다. 예전이라면,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아이를 데려다주고는 필라테스를 가거나 도서관에 가는 게 나의 오전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집으로 온다. 출근 전, 서둘러 아버지의 점심을 준비한다. 하지만 또 세 숟갈 드시고는 입을 다물어 버리신다. 먹기를 거부하신다. 평생 땅을 일구고, 땅을 넓히는 재미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지금 당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신다. 이러느니 차라라 죽지 싶은 마음이 강하신 듯하다.
내 마음도 그에 못지않게 복잡하다. 시부모지만 '자식'된 도리로 기꺼이 돌봐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그러나 그 뒤로 슬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도대체 언제까지?'라는 마음. 이제껏 우리끼리, 내 방식대로 살아오다가 이제는 아버지의 식사를 우선 챙기고, 아버지를 편안하고 쾌적하게 모시는 게 우선순위가 되어버린 생활. 기한 없이 계속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체한 듯 막혀올 때가 있다.
평생 일만 해 오신, 손주들 재롱에 웃으며 삶의 여유를 누려볼 새도 없이 늙어버린 부모의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나는 내 삶의 고달픔이 더 크게 다가온다. 모임이라도 가면 '시아버지 모신다며? 아이고 고생이 많다.'라며 성급히 위로하려는 지인들의 말도 듣기 싫은 나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만 싶다. 모임도 안 나간다.
2018년 8월. <아버지의 요양원 입소>
퇴근하고 서둘러 저녁을 준비하는데 아이가 핏자국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다. 화장실부터 소파까지 찍혀 있는 핏자국. 힘이 없어 휘청거리며 화장실을 다녀오다 문턱에 넘어지셨나 보다. 새끼발가락 쪽이 찢겨 있고, 일어서지를 못하신다. 원래부터도 시원치 않았던 고관절이 골절된 상황이지만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 일어서서 화장실도 못 가게 된 아버지는 요양원으로 보내달라고 하신다. 자식들에게 수발들게 하는 게 못내 마땅치 않으신 거다.
하지만 요양원 자리도 쉽지 않다. 특히 남자 어르신들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완력도 부리고 무겁기도 하니.., 요양 보호사들 입장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큰일이다. 결국 요양병원에 석 달 정도 계시다가 지인의 소개로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었다.
2018년 10월. <고향집 정리>
아버지 어머니가 사시던 집을 정리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건강 상태로 봐서는 또다시 그 집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거 같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일. 부모님의 옷, 사진, 미리 해 둔 수의 등을 챙기고, 나머지는 쓰레기 처리 업체를 불러 정리했다. 장롱은 부셔서 땔감용으로 뒷밭 구석에 모아 두고, 분리수거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가져갈 것들을 차에 싣고 떠나니 빈집이다.
40년 전, 이 집을 지으실 때는 얼마나 흐뭇하셨을까? 3남 3녀의 자식들에게 찬 바람을 막아주고, 편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던 가장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이제는 텅 빈, 낡은 집과 휑한 마당이 꼭 부모님을 닮은 것 같아 울컥하다. 평생 허리 한 번 못 펴고 일만 하다 늙어버린, 이제는 치매로 이 상황을 인지조차 못하시는 어머니의 일생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날이다.
2019년 11월. <어머니의 뇌출혈>
시누이 집에 살면서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던 어머니가 센터 화장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제대병원에서 수술, 집중치료실에서 일반 병실로 이동하는 순간, 나에게는 비상 상황이다. 간병인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등록된 간병인 협회에 죄다 전화를 돌려 겨우 구인, 1주일에 간병비만 70만 원이다. 간병인이 준비해 오라는 물품들 - 콧줄로 식사를 넣어야 해서 피딩백부터 기저귀, 방수패드, 욕창방지용 에어매트, 마데카솔, 비닐장갑, 비닐팩, 치매장갑 (손으로 링거줄을 빼지 못하게), 심지어 페브리즈까지- 이 만만치 않았다. 이 모든 걸 구해오는 것도 내 몫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진단서를 한 장 떼려 해도 나에게는 권한이 없었다. 며느리라서, 직계 가족이 아닌 나는 이렇게 서류 한 장 뗄 권한도 없이, 빨빨거리며 이 일들을 다 해 내고 있다.
2020년 2월. <어머니의 욕창>
제대 병원에서는 장기 입원이 불가해서 제주의료원으로 옮겨 치료받던 어머니. 제주의료원이 코로나 지정병원이 되어서 옮겨야 한다는 전화. 다시 병원을 옮겼다. 새로 맡게 된 간병인이 부른다. 어머니 등에 크게 생긴 욕창 두 부분. 검게 썩어가는 욕창이 심상치 않았다. 코로나로 보호자들의 면회가 어렵던 상황에 어머니의 욕창이 그렇게나 심각해져 있음을 아무도 몰랐다.
2020년 9월. <아버지의 식사 거부>
아버지가 계시는 요양원에서 전화. 아버지가 식사를 거부하고, 입을 꽉 다물고 열지를 않으신단다. 요양원에서는 안 먹는다고 놔둘 수는 없다는 입장. 신경정신과에 가보자고 한다. 요양원 차로 오신 아버지를 병원 로비에서 만났다. 보호자 신분으로 내가 한 일이라고는 1분 정도의 진료, 약국에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고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는 일. 그렇게 해서 그나마 다섯 숟갈 정도 드시고, 간식도 좀 드신다고 요양원에서 다행이라며 전화가 왔다. 이게 옳은 일인지 나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2021년. <1억이 동나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다시 입소했으나, 욕창 때문에 요양원에서는 봐줄 수 없단다. 또다시 요양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8월에 장폐색으로 입원했다. 매주 어머니, 아버지 간병비만 160만 원 정도 나간다. 그 사이 간병비가 하루 10만 원에서 11만 원으로 올라 있었고, 간병인들 식사 대금도 따로 지불해야 한단다. 거기에다 병원비는 병원비대로, 물품 대금과 목욕비도 또 따로 정산해야 한다. 아버지가 2018년에 주신, 통장에 있던 1억 1000만 원이 이렇게 동이 나 버렸다.
2022년 1월. <요양원에서 거부당한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처음 만난 때부터 이제껏 큰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유순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욕창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요양원에서 거부를 한다. 의료기관이 아니므로 봐줄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 쪽에서 문제가 생겼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요양원으로 돌아가려고 전화를 했더니 요양원에서 아버지의 입소를 거부한다.
그동안 음식을 거부한다고 입을 꽉 다물어 요양 보호사들을 애태우고,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시키는 과정에서 보호사들에게 꽤 여러 번 심한 욕도 하셨나 보다. 어머니에게 평생 소리 지르던 버릇이 어디 가나 싶다. 요양 보호사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해서 받아 주라고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긴급 상황이다.
2022년 2월, <시동생의 돌봄 시작>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찌 돌볼 것인가에 대한 큰 시누이의 판단에는 서울에서 홀로 지내는 시동생에 대한 걱정과 우려까지 결부돼 있었다. 고학력자이나 코로나를 거치는 사이, 연구소 자리도, 강사 자리도 잃은 50대의 싱글 남동생의 생계, 부모님을 맡길 기관의 부재가 맞물려 동생에게 두 분의 간병을 요청. 시동생이 어머니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왔다.
집은 시누이 미용실 옆 세 주던 집을 비워 주었고, 생활비 100만 원과 약값, 기타 비용은 우리 집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2024년 10월 현재. <혼자 남은 어머니. 돌봄은 현재 진행형>
2022년 6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로도 계속 시동생이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어찌나 꼼꼼하고 철두철미한지 어머니의 썩어 들어가던 욕창이 말끔히 나았다. 그 덕분에 이번 여름에는 목욕 봉사차량을 불러 목욕까지 할 수 있었다. 시간 맞춰 식사를 챙기고, 누워있는 몸을 돌려주고, 간간히 휠체어에 앉혀 일광욕도 시킨다.
이야기나 통하면 그나마 낫겠지만, 한 마디도 못하시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산송장 같은 어머니를 2년째 돌보는 시동생이다. 아버지도 돌아갸셨고, 이제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자기 삶을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돌봄 공부를 하는 사이, 시동생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병원에서 욕창이 생기도록 방치되고, 요양원에서 거부당했던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꼼꼼하고 다정하게 돌보고 있는 아들에게 나는 이제 응원의 시선을 보낸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그 빈자리를 실감하고 애도하는 데에도, 다시 자기의 길을 가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리겠지. 그래도 인생에서 지금의 시간이, 부모의 마지막 생을 함께 하고, 죽음의 순간까지 배웅해 드리는 이 시간이 그에게 큰 힘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리 되길 바란다.
(202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