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일을 계속하는 법

by 최해나


과학자의 삶은 꽤 고단하다. 이를 표현하자면 ‘을’의 연애와도 같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을’의 연애.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까만 머리칼을 차분히 늘어뜨린 그녀. 왠지 우울해 보이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기란 쉽지 않다. 오늘따라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내가 뭘 잘못한 것인지. 조금 전에 저녁 메뉴 선택을 할 때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어머나! 갑자기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띤다. 혹시 그녀의 기분은 꽤 괜찮은 편인데 나 혼자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지고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내 앞에 놓인 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는 항상 이런 ‘을’의 연애를 하고 있다. 가설 설정, 연구 수행, 결과 해석···. 끊임없이 돌아가는 영원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성심성의껏 연구를 진행하지만 결국 손에 쥐어진 것은 휜 종이 안의 까만색 그림 또는 수치. 까만 것은 데이터고 흰 것은 종이인데 그 사이 어느 즈음 얇은 선과 진한 선의 대조로 결과를 해석한다. 그런 실험 결과들을 보면서 의미 있는 시그널을 혹시라도 놓칠세라, 그녀의 속마음을 읽듯 데이터를 봐야 한다.


더욱더 고단한 것은, 연애가 쉽지 않듯 연구도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늘 실망한다. 그리고 매일 실패 비슷한 것을 한다. 100개의 데이터가 나오면 그중에 내가 잡아 쓸 수 있는 데이터는 대여섯 개쯤. 나오지 않는 데이터는 왜 그런지 트러블 슈팅(trouble shooting) ¹을 해야 하고 잘 나온 데이터는 정말 그 데이터가 맞는 것인지 적어도 세 번은 같은 실험을 해봐야 한다. 수치는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수치인지 확인해야 하고 혹여 가설이 틀렸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 가설 재설정을 해야 한다.


이런 직업을 갖고 10년 이상 일해 오면서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높은 자존감이 한몫했다고 보는데, 오늘 여기에 나의 자존감을 높여준 레시피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첫 번째, 일주일 혹은 한 달 주기로 했던 일 정리하기. 연구라는 이름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 비슷한 일을 10번 혹은 100번 반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젠 분명 꽃피는 3월이었는데 눈 깜짝할 새 더운 여름이 와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했던 일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절대 허투루 살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곤 한다.

‘저번 달은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군.’

‘그 전달에는 학부 실습을 하느라 바빴군.’

별 의미 없이 후루룩 지나간 것으로 생각했던 하루, 일주일, 그리고 한 달 동안 생각보다 많은 일을 고민하며 처리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중요 레시피: 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한 스푼.


두 번째, 실천 가능한 미래를 계획하기. 과거를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계획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더 잘할 수 없을 것이 명백한 일들을 ‘언젠가’라는 책임감 없는 부사로 휘갈겨 적는 초등학생이 아니다. 할 수 있을 법한 일,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감이 오고 나에게 충분한 보상이 오는 일을 위주로 추후 나의 미래를 계획한다. 미래의 계획은 조만간 현재, 그리고 과거의 일이 되므로 적당하게 세운 계획은 나의 인생에 큰 틀을 짜주고 이렇게 살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그리고 미래에 이런 계획을 다 수행한 나는 지금보다 훨씬 멋진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해 준다.

중요 레시피: 이유 있는 기대감 한 스푼.


세 번째, 현재의 자신을 응원하기. 과거와 미래의 계획을 다 세우고 나면 현재의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저기 저 먼 곳에서 오늘의 삶을 관망해 본다. 아무리 과거의 일과 미래의 계획을 잘 정리하고 짜 놨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인생을 멋있게 보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이 일을 왜 하는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혹여 의미가 없어 보여도, 혹자가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의심할 때에도 나의 일을 믿는다. 그리고 나를 믿는다. 사실 여기에는 약간의 뻔뻔함이 필요하다 (경상도에서는 이를 뻔치라고 표현한다). “나는 좀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잊지 않아야 한다.

중요 레시피: 뻔치를 가장한 용기 한 스푼.


연민과 기대감, 그리고 용기를 한 스푼씩 넣다 보면 이제 을의 연애에서 좀 더 건강한 관계의 연애가 된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듯, 그녀가 나를 사랑한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먼저 과학을 사랑했어도, 그래서 이 길도 들어오게 되었어도, 아마 과학이라 불릴 수 있는 그 무언가도 나를 사랑하겠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당신이 나를 사랑할 법한 이유를.


그래서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시작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을의 연애가 마무리되고 우리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나는 과학의 길로 들어온 나 자신에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엄지를 치켜세워 줄 것이다.





1. 트러블 슈팅(trouble shooting):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것을 진단하고 해결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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