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면의 기억, 점의 기억

by 나른한 뱃살


“易(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전이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삶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늘 변한다.


우리의 때와 곳은

머물지 않는다.

지금 당장 여기는

방금 아까 거기로

금새 물러나고

조금 이따 저기는

어느새 코 앞에 서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단락진 각방이 아니라

이어져 쏟아지는

물줄기와 같다.


우리는 유동히는 현실에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를 잇는

현재의 정신줄을 붙잡으며 버틴다.


기억은 그렇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자리잡은

우리의 현재를 지탱하는 반절이다.


기억에는 좋은 것만 있지 않지만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나의 현재를 이루는 의미가 된다.


우리 인생의 길이에

정헤진 분량이 있다면

시작에서 가까운 현재에선

기대는 늘고 기억은 줄며

끝에 가까운 현재에선

기대는 줄고 기억은 느나 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수록

자꾸 뒤돌아 보며

흐릿한 기억 사이를 서성이다

좋은 조각들을 주워낸다.





딸구들과의 시간들을

우리 부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우리 딸구들에게도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다.


그런데 녀석들은

우리 부부와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까?


예전에 들었던

고양이 전문가 미야옹철 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람의 기억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점의 기억이라면

냥이의 기억은 어떤 상황을 통으로 기억하는

면의 기억이라고


사람은 자신이 겪은 일의

정확한 때와 장소

전체적인 맥락과 작은 디테일까지 기억한다.

하지만 냥이는 그렇게까지 기억 못한단다.

그래서 냥이와의 좋은 시간은

일종의 루틴처럼 반복해서 만들어 보란다.

미야옹철 선생의 조언에 따라

지금의 세 딸구들과

나름의 루틴을 만들며 산다.


딸콩이는 밥때가 아닌데도 자주 배고파한다.

녀석은 배고프면 과하게 살가와진다.

엄마에게 호소해봤자 안되니

언제부터인가 나한테 온다.

한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면

내 품에 폴짝 뛰어들어 안기며 보채거나

앞발을 내밀어 내 얼굴을 만지며 조른다.

이때다 싶어 한껏 버티며

녀석의 애교를 누린다.

밥을 주면 그런 애교는 끝이기에


막내 딸님이는

내 출근길에 양말을 꺼내려고 하면

늘 서랖장 위로 뛰어 오른다.

나는 출근길을 잠시 멈추고

님이가 좋아하는

머리 쓰다듬기를 해준다.

기분이 부풀어 오르면

님이는 쓰다듬는 내 손을

제 언니 그루밍헤 주듯 핥아준다.


딸랑이와는 출퇴근의 루틴이 있다.

딸님이와 인사를 마치고 신발을 신으러 나가면

딸랑이가 신발 주변을 맴돌며 뒹굴고 잇다.

딸님이를 넘어섰더니 딸랑이가 다음 차례다.

뒹구는 녀석을 잠시 말랑말랑 만져준다.

...

퇴근길에 문을 열면

할머니댁에서 가져온 옛 가구 위에 서서

얼굴을 빼꼼히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내 신이 났는지 방바닥에 뒹굴뒹굴 트위스트

다시 숨숨집 위로 뛰어올라가 드러눕는다.

가방만 내려놓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

녀석을 쓰담쓰담 해준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잘 지냈어?

동생들이랑 잘 놀았어?

이때만큼은 딸랑이가 만지는 것을 쉽게 허락한다.

감사하옵게도


밥달라는데 외면하니 삐진 딸콩이 + 서랍장 위의 딸님이 + 숨숩집 위에서 어서 만지라는 딸랑이



이렇게 우리 사이에 쌓아가는

면의 기억들이

언제인가

점의 기억이 되어

딸구들에게

선명히 남겨지려나?

그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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