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냥이의 균형감각

by 나른한 뱃살


냥이는 이중적이다.


어떤 때는 매우 나른하고 한가롭다.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대단히 민첩하고 예민하다.


어떤 때는 마냥 치대지만

어떤 때는 어른처럼 의젓하고,

어떤 때는 한없이 살갑지만

어떤 때는 저만치 떨어져있다.


어떤 때는 온갖 일에 참견하지만

어떤 때는 시큰둥하게 무관심하고,

어떤 때는 시체놀이 하듯 뒹굴뒹굴이지만

어떤 때는 온 사방을 날아다닌다.


냥이의

이런 모습과 저런 모습

다른 두 가지의 공존은

녀석들의 또 다른 특징인

균형감각으로 설명될 수 있으려나?


녀석들은 지들 발크기만큼인

작은 티스푼 2개 크기 정도?

그정도 디딜 곳만 있으면 잘도 올라선다.


전생에 평균대 올림픽 국가대표라도 했나

왜 그리 높고 가느다란 곳에

잘 올라가는지

가끔은 화들짝 놀라기도 하지만

참으로 대단하다 싶다.


발에는 무슨 센서가 달렸기에 그리 민감한지

씽크대나 옷장 위에 올라가면

다른 그릇이나 장식물들을 건드리지도 않고

잘 피해서 발걸음을 내딛는다.

(물론 가끔 대형사고를 치기는 하지만...)


문 위의 딸랑, 그걸 따라하는 딸콩, 에어컨 꼭대기에 모인 세 자매



나는 냥이들의 그런 균형감각을 보면

매우 부럽다.

나이 들어가면서 온 몸이 뻣뻣해져

가려워도 손이 안 닿는 데가

늘어가는 것이

서글픈 것만은 아니다.


마음의

정신의

유연함도 점점 잃어가는 것 같다.


늘 해오던 것,

좋아하던 것,

믿어오던 것을

더욱 고집하게 되는 것 같다.

그 반대편에 대해서는

관대한 여유가 줄어간다.

그만큼 치우친 게다.




균형감각과 아주 비슷한 개념이

유학에서 말하는

中(중)이다.


요즘은 대개

中을 ‘가운데’로 알고 있지만

옛 유학의 성현들은

‘공간적으로 중간‘을 뜻하는

그런 의미로 中을 쓰지 않았다.


주자는 中을

‘不偏不倚(불편불의)’라고 해석했다.

즉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음’

이것이 유학이 지향하는 진리성이다.


中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유학의 두가지 통찰이 전제된다.


첫째,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한다는 易(역)의 진리

둘째,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관계의 존재라는 인(仁: 어짊, 사랑)의 진리

(공자는 仁을 人이라 했다.

즉, 사람됨의 본질을 仁으로 본 것이다.

이때 仁은 두 사람(人+ 二),

즉 관계에서 성립하는 개념이다)


위 두 가지 통찰을 전제하면,

'고정된 불변의 가운데' 같은 것은

적어도 우리 삶의 현실에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삶과 세계는

변한다(易)는 조건과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라는 조건 속에서

잠시도 쉼없이

엮이고 섞이며

가변성과 상대성을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中은

그와 같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상황 속에서

부단히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어느 한 편으로 기울거나

하는 삶의 자세를 경계하는 것이다.


中은

'가운데'라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불편불의(不偏不倚)’라는 동적인 개념이다.

어제의 中이 오늘의 中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그에게의 中이 그녀에게의 中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어제와 오늘, 그와 그녀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딸구들은

저 높은 곳

저 가느다른 곳

깊고 좁은 구석을

천진난만하게

유유하게

노닐며 드나든다.


떨어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부딪치지도 않으면서

...

...


균형감각 짱은 딸랑이다. 블라인드 위, 엄마 조각 그림 위, 베란다 중간문 위 등등 안 올라가는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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