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작품을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파랑새가 의미하는 바는 안다.
인간은 파랑새를 찾아다닌다
파랑새는 행복을 뜻한다.
찾아다닌다는 건
무언가 잃어버렸거나
어딘가에 귀한 게 있다 할 때
하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이 땅에 태어난 걸까?
아니면
애초에 인간 안에 없는 까닭에
행복을 저 밖에서 찾아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왜 파랑새를 찾아다닐까?
행복을 설파한 사람 중에
제법 유명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했다.
크게 틀린 말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100여년 전 우리나라는 신분사회였다.
그때 태어났으면 나는
양반이었을까?
종이었을까?
그 당시를 기준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
신분제가 옳다 혹은 맞다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리 동의하지 않는다.
목적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텔로스(τέλος, telos)다.
끝, 완성을 뜻하기도 한다.
목적은 끝에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목적은
우리의 현재를 평가절하한다.
왜냐면 목적은 도달해야 할 대상으로서
현재 여기에 있지 않고
미래 저기에 있기 때문이다.
미래 목적의 위대함 앞에서
지금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저 멀리 나중에 있는 목적을 위해
지금은
중간지점 혹은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위해'라는 말을 기준으로
목적은 모든 현재의 위에서 군림하고
현재는 그 아래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을 쫓는 삶은
늘 지금을 채찍질한다.
한 걸음이라도 더
목적에 가까와질 수 있게.
그 목적이 행복인들
다르지 않다.
내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내 삶은 내 삶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므로 내 삶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내 삶에 행복이 필요할 수는 있어도
행복을 위해 내 삶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머리로는 행복을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지만
내 몸은 무슨 몽유병자처럼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손에 닿지도 않을
파랑새를 찾아 헤매곤 한다.
내가 우리 냥이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녀석들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파랑새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마치 디오게네스처럼
햇살 아래 늘어져 있는 녀석들을 보노라면
매일매일의 목표와 목적 아래 허덕이는
내 자신이 이상해진다.
녀석들은 자신의 삶 자체를
현재에 맡긴 듯 아랑곳없는데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나의 오늘을 빼앗겨 아둥바둥한다.
그렇게 놓쳐버린
수많은 현재를 떠올려 본다.
조용필이 부른
(박정현이 커버한 곡을 더 좋아하지만)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멀리
높이
별을 쫓듯
목적에 눈이 멀어 살던 시절들이
지금은
내 곂에 또아리 틀고 앉아
내 몸을 따뜻하게 해주며
갸르릉대는
우리 딸구들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