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는 타이레놀이 없나요? (하)

by 바트버그

1.

280조.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가 지난 20년 간 기록한 매출이다.

시중 약가가 28만원이니, 그동안 1억 개가 팔린 셈이다.

100,000,000개를 20년의 세월로 나눠보면 하루에 22,831개가 나온다니

실로 엄청난 양이다.

항체 의약품 단 1개에 대해 팔린 사실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한 가지 제품을 그만큼 팔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2.

도대체 항체가 무엇이길래 280조라는 거액을 벌어 들이고

바이오 기업들이 기를 쓰며 항체 공장을 짓고

또 왜 나는 항체를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출근할까?


인간이 수정란 세포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항체의 시작점 또한 세포다.

우리는 항체를 만드는 세포를 면역 세포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다.

그렇다면 면역 세포는 어디 있는가?

당신의 심장에 있는가? 뇌에 있는가?

아니, 뼈에 있다. 그것도 모든 뼈에 있다.

정상적인 뼈는 겉바속촉이기 때문에

딱딱한 겉부분인 골막과 말랑말랑한 골수로 이루어져있다.


면역 세포는 말랑말랑한 골수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다가 때가 되면

두 가지 인생 버전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병원균을 기억하며 살 것인가

기억하지 못하면 살 것인가.

그게 면역 세포가 가질 운명의 전부다.


언뜻 보기에 병원균을 기억하며 사는 세포의 인생이 더 강하고 좋아보이지만,

그렇다 해서 기억 못하는 면역이 멍청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단 하나의 임무만을 수행하며 사는 개미와도 같아서

늘 전쟁 상황에 처해 산다. 365일이 그들에게 전시 상황이다.


기억 못 하는 세포들은 참호에서 일선으로 싸우는 이등병들과 같다.

죽을 힘을 다해 싸워보지만 병원체에 얻어터지기 일수다.


강한 병원균이 오기만 하면 이등병들은 패배하고

병원균들은 참호를 가볍게 넘어 더 깊은 적진에 들어선다.

그러나 당하고 있지만은 않다.

앞에서 이병들이 죽어가며 시간을 끌어줄 때 기억하는 세포들은 림프절이라 불리우는 막사에서

전술을 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금 처들어오는 적의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세포 데려와!

하고 명령하면 해당 병원균에 특이적인 '항체'를 보유한 세포가 등장해서 미친듯이 분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것을 생물학적 용어로, 다음과 같이 부르기로 했다.

면역 세포가 기억 못 함 = 선천성 면역

면역 세포가 기억 잘 함 = 후천성 면역

바이오 의약품은 항체를 매개로 한 후천성 면역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일하다 보면 이런 근사한 것들을 자주 망각하고 산다.

그게 나와 같은 오퍼레이터의 삶이다.

아침 8시 출근, 저녁 8시반 퇴근하는 정해진 일상에서

항체는 저편으로 숨겨진 거대한 Bioreactor만 보고 살면 그렇게 된다.

그걸 못 견뎌서 일찍이 퇴사하는 동기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무던해지는 것과 별개로 면역계와 같이 꾸준한 선택을 하면 얻게 되는 게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번주도 오퍼레이터의 운명을 선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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