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세이읽는남자 Nov 20. 2023

긍정적 에너지를 지구만큼 모아서

드래곤볼파와 슬램덩크파 두 조직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드래곤볼파였다. 최신판 단행본이 나왔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서점으로 가서 구매했다. 드래곤볼의 범우주적인 세계관에 빠져 있던 나는, 슬램덩크를 그저 일본의 어느 시골 동네에서 농구 이야기쯤으로 치부했다. 지구를 넘어 우주의 다양한 종들과, 미래에서 온 사이보그와, 사후세계에 사는 신까지, 우주의 존망이 걸린 마당에 한가롭게 레이업이나 하는 농구 이야기라니, 가소로웠다.


그런데 스멀스멀 슬램덩크에 나오는 대사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을 하면서(이를테면 왼손은 거들 뿐이라거나, 불꽃남자 정대만 같은) 궁금해서 몇 편 골라서 보기는 했으나, 절대로 정주행은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드래곤볼은 마인부우 편(드래곤볼 Z) 최종화까지 다봤으나(나는 Z에서 끝을 냈는데, 그 이후로 드래곤볼 슈퍼, GT나 수많은 외전들이 나오며 아직도 드래곤본 시리즈는 영생 중이다) 슬램덩크는 여전히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심지어 결말도 모른다. 최근에 슬램덩크 극장판 시리즈가 새롭게 개봉을 하면서 그 시절을 보낸 아재들에게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 슬램덩크 이야기가 나오면 당당하게 얘기했다. ‘난 드래곤볼파여서 슬램덩크는 몰라. 재밌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그래도 만화는 드래곤볼이 레전드지’. 한번 젝키는 영원한 젝키와 같은 심정이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기술 중에 ‘원기옥’이라는 게 있다. 박빙으로 싸우다가 마지막에 날리는 끝내기 필살기 같은 건데, 두 팔을 하늘로 뻗어 만세 모양을 취하고 ’모두들 조금씩 도와줘‘와 같은 대사를 치면,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가 조금씩 주인공의 만세 팔 위로 모인다. 구체 에너지 덩어리가 엄청나게 커지면 ’지금이야‘와 같은 극적인 대사와 함께 그걸 냅다 빌런에게 던지고 ’끄아악‘ 비명을 지르며 빌런이 소멸하는 식이다. ’모두의 도움 덕분이야‘와 같은 훈훈한 대사로 마무리.


원기옥의 에너지를 채우는 과정에 조금 감동이 있다. 인류를 포함해서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십시일반으로 힘을 합쳐서 적을 물리친다는 가슴 뿌듯한 스토리 때문이다. 교실에서 두 팔을 위로 쭉 뻗은 채로 ’모두들, 조금씩, 부탁한다‘고 외치며 심각한 표정으로 원기옥 모으는 시늉을 하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지금보다 미래가 훨씬 나을 거라는 희망, 숨 쉬는 것조차 벅차오르는 범사 감사한 마음, 일상의 작은 부분에도 까르르 웃을 수 있는 유쾌함, 즐거움, 용기, 자존감과 같은 긍정적 에너지가 내 안에 가득 차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기분 좋은 생각만 하라거나, 나는 멋지다, 할 수 있다를 계속 되뇌고 적고 외치는 방법은 일시적일 뿐이고 내 안에 오래도록 달라붙어 있진 않는다. 긍정적 에너지를 스스로 낼 수 없다면 원기옥 타이밍이다. 주변에서 에너지를 조금씩 끌어오는 필살기를 써야 한다.


눈을 감고 에너지 받을 수 있는 곳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 어느 사건, 좋아하는 물건,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행복한 상상까지.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대상에서 좋은 것만 뽑아와서 에너지를 모은다. 눈 감는 것만으로 잘 안되면 팔을 번쩍 들어서 만세 자세를 취한다. 에너지 구슬이 커질 때까지 긍정적 에너지를 꽉꽉 채운다. 그리고 물풍선 투하하듯이 들입다 내 주변을 향해 던진다. 기분이 좀 나아졌으면 외친다. ‘모두들 덕분이야. 고마워’.


그런데 원기옥은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많은 행성에서는 크게 만들 수 있지만 생명체가 몇 없는 작은 행성에서는 많이 모으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십시일반이라 모수가 커야 에너지도 크게 모을 수 있다는 설정인데, 마찬가지로 긍정적 에너지를 크게 모으기 위해서는 내 주변의 환경 역시 긍정적인 곳에 많이 노출될수록 좋다. 열정이 있는 자리, 희망을 이야기하는 곳, 사람과 감동이 있는 현장, 아니면 하다못해 좋은 풍경과 신체적 노고가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집에 혼자 쭉 있으면 원기옥이 작동할 수 없다. 움직여야 하고, 만나야 하고, 활동하고,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직장인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뭘 좀 먹고 잠들어야 하는 직장인은 과연 긍정적 에너지를 모을 기회가 있을까.


있다. 티끌이라도 모아서 원기옥을 완성하면 된다. 적어도 지하철에서 하는 활동이 있고,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있고, 퇴근하고 잠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고, 주 5일제 근무니까 토요일이 있고, 일요일도 있다. 긍정의 에너지를 뽑아낼 창구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원기옥은 나무나 꽃과 같은 자연에서도 에너지를 끌어온다.


경험하고 활동해서 긍정적 에너지를 잔뜩 지구만큼 크게 만들어야지. 물론 내 인생에 더 강한 빌런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그때마다 옷 찢어지게(찢어진 옷이 드래곤볼 주인공의 시그니처) 싸우겠지만 그때마다 또다시 원기옥을 가동해서 필살기를 날려가며 빌런을 물리치고 그렇게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되겠지.


그러니까. 부탁한다. 모두들.


작가의 이전글 원하는 영혼의 사양을 고르시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