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아이의 사랑스러운 청소
"제 MBTI는 INFP예요."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이 왔을 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한 아이는 자신을 MBTI로 소개했다. 그 아이의 소개를 듣고 평소 아이의 행동과 태도에서 이해되지 않는 지점들이 단숨에 연결되며 '아, 그래서 그렇게 했던 것이구나' 생각했다.
자신의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 현실과 직관의 사용 빈도, 선택과 사고의 흐름, 의사를 결정하는 성향을 반영한 MBTI는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을 준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16가지 유형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에 대한 타당성은 잠시 보류하고, 내가 사랑하는 'INFP'인 아이의 행동에 대해 납득한 지점은 이러하다.
'INFP'인 아이는 집에서 엄청 직설적이고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며 사고의 체계가 정교하고 논리적이어서 때로는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옳은 말을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 대한 판단은 지극히 너그럽다. 그리고 그런 직설적인 화법을 학교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오면 학교에서 불편했던 일들의 원인과 이유를 정확한 언어로 표현한다. 한마디로 '방안퉁수(숫기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못하고 집안에서만 큰소리치는 치는 사람을 이르는 방언)'다.
상황과 환경에 대한 눈치가 빨라서 타인의 성향이나 환경에서 요구하는 과업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만 계획적으로 일을 해결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하기 때문에 일을 엄청 미룬다. 자기 이상이 높기 때문에 일을 완벽하게 해결하고 싶은 욕구와 디테일에 신경쓰지만, 하나를 끝마치기 전에 순간적으로 더 좋아하고 즐거운 일에 몰두하느라 기일을 놓친다. 자신의 꾸준하지 못한 모습을 몹시 슬퍼하지만 적극적으로 고칠 의지는 없다. MBTI 유형 중에서도 'INFP'는 사고의 결정을 최후의 최후까지 미루는 극강의 'P' 성향을 지닌다.
우리 가족은 일에 대한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분/초 단위로 진행하는 극 J(MBTI유형)가 두 명, 직장과 업무에서만은 철저하게 계획을 진행하되 집에서는 조금 느슨해지는 j(MBTI유형)가 한 명, 그리고 'INFP'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오묘한 공간은 'INFP' 아이의 방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이를 찾기까지 바닥의 트랩들(의도하지 않았으나 설치된 것으로 추정)을 잘 피해서 엄청나게 복잡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나름의 규칙으로 정리된 물건들 사이를 뒤져야 한다.
극 J들의 극성스러운 조언에 의해 'INFP' 아이의 방이 정리되는 때는 1년에 두 번,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 시점을 중심으로 약 3일~4일의 시간 동안 'INFP'아이의 방은 바닥의 트랩들이 제거되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규칙으로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365일 중에서 약 10일 내외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INFP' 아이의 방은 오묘한 공간을 유지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거실이 조금만 청소가 덜 되어서 너저분해지면 그것을 가장 빨리 발견하고 굳이 지적하는 'INFP'아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이다. 가족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 있을 때 우리 집에서는 최소 일주일 전에 공지하고 일정이 있기 전날 "내일 언제쯤 집에서 나가야 해?/ 00시 00분에 나갈 거야."라는 대화가 오고 간다. 물론 이 대화 장소에 'INFP'가 항상 참석해 있었지만 10번에 9번을 "어? 언제 말했어? 내일?"하고 묻는다. 10번에 제외된 1번은 'INFP'와 관련된 이슈나 행사일 경우다.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평안한 성품인가?
그런데 2024년 7월 12일 금요일.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INFP'아이의 방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INFP' 아이는 덤덤하고 후련한 표정으로 방을 치운 자신의 노고를 칭찬해 달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많이 놀랐지만 최대한 티내지 않고 아이의 노고를 칭찬하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마음 한 켠이 불안해졌다. 극강의 J인 남편과 아이의 충돌은 없었는지 'INFP'아이의 방에서 나온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온 남편이 청소한 아이를 칭찬했다. 쓰레기통을 들고 다용도실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남편을 조용히 따라가서 작은 목소리로 'INFP'아이가 청소한 이유를 물었다.
"자기 생일을 상쾌한 기분으로 맞이하고 싶어서 청소했대."
'INFP'아이의 사랑스러운 자기애로 인해 깨끗한 상태의 방을 몇 일 더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