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녀씨는 환갑에 하던일을 모두 정리하고 ‘친정엄마’라는 극한직업을 택했다.
공들여 키운 딸을 시집을 보냈건만, 일하는 딸을 위해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난 단 3개월의 육아 휴직만을 사용하고 회사에 복직할 수 있었다. 밖에서 느끼는 쾌감도 있을 텐데 여자라서 아이만 키우고 사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이야기하던 엄마는 딸이 육아로 인해 눈치 보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길 바랐다.
집안 살림은 물론 아이의 이유식까지도 손수 만들어 먹이며 아빠, 엄마보다 더 극성스러운 할머니를 자청했다. 쉬는 날 놀이공원을 갈 때도, 레고블록방에 갈 때도 “할머니”를 부르면 “내 새끼가 원하면 함께 가야지” 하고 따라나섰다.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 아이는 쑥쑥 커갔다.
“병원에 좀 가봐야겠다. 휴가 좀 내.”
엄마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어디가 안 좋은데?”
“참았는데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별거 아닌 거 같으니 유난 떨지 마라…”
손은 거칠고, 주름은 더 깊어진 할머니가 내 앞에 있다.
“엄마는 참을게 따로 있지, 아프면 아프다고 진작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왜 그래 진짜.”
아이를 돌보는 일이 힘에 부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자식 잘 키우겠다고 애써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식 얼굴에 뾰루지라도 하나 올라오면 귀신같이 알아차렸을 텐데, 매일 만나는 엄마의 건강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화가 났다. 다행히도 검사 결과가 나쁘지 않아 한시름 놓았지만….
무조건 엄마를 쉬게 해야 한다. 가족들과 함께 가면 또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쁠 테니 단 둘이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온천과 벚꽃을 즐길 수 있는 큐슈 봄꽃 여행』
여행상품을 몇 개 검색하다가 가장 빠른 날로, 가까운 일본으로 예약을 한 후 엄마와 남편에게 통보했다.
“엄마, 가자!”
엄마는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었다. 손주를 돌보는 친정엄마라는 극한직업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우리 둘이? 피곤해, 그냥 가까운 곳이나 가.’라고 말은 했으나 설렘이 묻어있는 엄마의 목소리를 감출 수는 없다. 딸이 예약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가는 척(?)은 하지만 동생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엄마를 보며 ‘이게 뭘 어렵다고 그동안 안 했나!’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비상약과 허리가 아플 때 자주 사용하는 보온 물주머니, 여행의 필수품! 수분 마스크 팩도 몇 개 챙겨 큐슈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동이 거기서 다 거기지.”라고 했던 엄마는 일본 우동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고, 한국에선 잘 먹지도 않는 달디단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벚꽃거리를 산책할 때는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야외 온천탕에서 목욕을 하니 피로도 가시고, 피부가 매끈매끈해진 것 같다며 엄마는 3박 4일 동안 잘 먹고, 잘 쉬고, 잘 쓰는(?) 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손주도 예쁘지만, 내 딸 힘들까 봐 봐주는 거야.’라고 했던 엄마의 고백에 가슴이 뭉클했고, ‘기억에 남는 봄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쑥스러우면서도 봄날처럼 따뜻했다.
엄마는 봄이 되면 딸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기대하는 것 같다. 이제 엄마는 육아에서 벗어났고, 나는 여전히 분주하지만 나중에 후회가 될까 싶어 엄마와 단 둘이 떠나는 늦은 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엄마,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