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그루 Aug 07. 2024

왕년에

부제 : 아깝게 놓친 것

  사람들로 북적이는 을지로 거리에서 난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차림새는 변함없이 깔끔했고, 여전히 당당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여전하구먼. 잘 지내지?”

  그는 십여 년 전까지 나와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선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꽤나 잘 나갔던 나의 상사였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그는 종이 한 장, 볼펜 한 자루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고, 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을 하는 일벌레였다. 본인이 원치 않는 시기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나야 했었기에 그의 뒷모습은 내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퇴사 후, 그는 아픈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삶을 재정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고, 몇 해 전 아내를 잃었지만 홀로 고향에 남아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왜 나야?’라는 생각에 슬펐고, 충격이었으며, 한동안 배신감이 들기도 했었노라 고백했다.

  “젊었을 때는 주변을 볼 여유도 없이 그냥 달리기만 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놓쳤던 것들이 보여. 열심히 회사를 다니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 덕에 아이들도 잘 컸고, 진급도 빠르셨잖아요. 그럼 됐죠.”

  “그렇지, 그 말도 틀린 건 아닌데 ….”

  그는 지금에 와서 후회되는 것도 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크게 바뀌지 않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노라 말했다. 어렵고 무서운 어른이었던 선배는 퇴직 후 마음씨 좋은 어르신이 되어 있는 듯했다.

  “젊었을 때는 내가 가는 길에 큰 바위가 나오면 그걸 부수고 깔끔하게 치우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여기 사람들이랑도 참 많이 싸웠지.”

  “에헴. 그땐 고지식의 표본이셨죠.”

  ‘요 녀석 봐라, 이제 많이 컸네.’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바위가 한두 개가 아닐 텐데 그걸 언제 다 부수고 치우겠나. 처음에야 할 수 있겠지. 나중에는 지치게 되어 있어. 피해서 가기도 하고, 그게 어려울 땐 그냥 품고 가는 거야. 그래야 목적지까지 갈 수 있거든. 그게 인생이야. 살아보니 그렇게 사는 게 맞아.”

  나이를 먹으니 욕심이 없어지고, ‘왕년에’를 내려놓으니 어린 사람 밑에서 회사생활을 하는 것도 힘들지 않다는 그의 목소리에서 평온함이 느껴졌다.


  회사로 돌아와 그가 남긴 여러 말 중 더 깊게 와닿는 말을 정리해 예쁜 메모지에 적었다.

  - 그때는 그게 성공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니 경력일 뿐이더라.

  - 자신을 압박하거나 몰아붙일 필요가 없다.

  - 건강도 젊었을 때 챙겨야 하더라. 그것만 남는다.


  신입 사원으로 출근했던 날,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해요. 차근차근 배우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던 그는 퇴직 후에도 나에게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주었다. 예전처럼 차근차근….

  몇 시간 후 카카오톡으로 커피 쿠폰과 후배에게 얻어먹은 점심이 참 맛있었다는 인사가 도착했다.

  ‘그래도 여기만 한 회사가 있겠나? 충분히 즐기시게.'


  지금의 이 시간이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배의 말처럼 충분하게 이 시간들을 충분히 즐겨보고 싶어졌다.

왜냐하면 난 왕년에~라고 말할 것도 없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특명! 취미를 찾아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