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박완서의 유작을 모아 맏딸인 호원숙 작가가 출간한「노란집」
나는 아직도 엄마를 부른다. 꽃이 피면 감탄사를 가장 먼저 전하고 싶어 엄마를 찾는다. 내 마음속 어린애는 아직도 엄마를 부르는데, 나는 어느 틈에 할머니가 되어 있다. 손녀를 부르는 내 음성에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어머니의 소리가 배어 있다. 엄마가 그랬듯이.(p7 서문, 엄마의 휘모리장단 중)
'어머니의 글을 읽으며 조용히 귀 기울이면 그리움에 눈물이 솟을지라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서문에 뭉클했다. 몇 해 전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호원숙 작가가 '엄마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를 소재로 글을 끄적이고 있어서인지 호원숙 작가의 마음이 더 깊게 느껴진다. 엄마를 기록하는 것은 단순한 추억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고 감사함이며, 위로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엄마는 딸이 잘 알지. 표정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그래서 우리 종녀씨도 내가 제일 잘 알지.'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산골의 노란집.
박완서 작가가 살다 떠난 그 집엔 그녀를 가장 잘 아는 맏딸과 사위가 살고 있다고 했다. 엄마의 정원을 가꾸며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곳에서 딸은 엄마에 대한 글을 쓴다.
「노란집」은 보태거나 덜어낼 것 없는 짧은 글들로 엮여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엄마한테 이름이 어렵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어릴 적 이야기, 첫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우울증에 걸려 돌아 누어 울다가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이야기, 새끼 고양이를 거느리고 나타난 고양이가 기특해 손주 새끼를 반기듯 두 손 벌려 나갔다가 공격태세를 취하는 고양이가 무서워 부엌문을 닫았다는 이야기 등 잔잔한 일상을 담았다. 하지만 그 평범한 글 속에 담긴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준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얘야, 너무 애쓰지 말아라. 편안하게 너의 속도대로 너답게 살면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란다. "
사람도 너무 눈독이나 손독이 들면 아무리 좋은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도 제대로 꽃피기 어렵다는 생각을 요즘 종종 하게 된다.(p178, 눈독, 손독을 좀 덜 들이자 중)
자연이 놀랍고 아름다운 까닭은 목련이 쑥잎을 깔보지 않고, 도토리나무가 밤나무한테 주눅 들지 않고, 오직 타고난 천성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있지 않을까. (p132,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중)
나의 사십 대 마지막 해가 시작되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하는 생각과 이제 슬슬 나이 듦 연습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글 하나하나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책 곳곳에 밑줄을 긋고 좋은 문장은 읽고 또 읽었다.
나는 회사원이다. 회사원들에게 12월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달이기도 하다. 최근 오르막 길을 걷던 사람의 내리막을 지켜보면서 품위 있게 내려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본인은 이용만 당하다가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애걸복걸하는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등산에 있어서만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 인기에 있어서도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 품위 있기가 더 어렵다는 걸 전직 권력자들의 언행을 보면서 곰곰이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p173)
'무엇하러 새해는 또 오나,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빠르다는 걸 알아버린 지 오래라 왜 이렇게 세월이 빠른 거냐는 주접 따위는 떨지 않겠다. 노년에 등산을 해보면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서 다칠 위험이 훨씬 더 많다. 빠른 것하고, 쉬운 것 하고는 다르다. (p204)
잘 살고 싶다.
낮은 언덕의 내리막 길일지라도 그때가 되면 꼭 품위있게 내려와야지 다짐에 다짐을 한다.
내려놓음이라고 해도 좋고 포기라고 해도 좋다. 여유 있게, 느긋하게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싶다. 그리고 먼훗날 나도 나의 신에게 고백하고 싶다.
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나도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고 싶다.(p299, 봄의 끄트머리, 여름의 시작 중)